경북 봉화군 금봉암 앞마당에서 고우 스님이 절에서 키우는 개 진돌이와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
새해특집 고우 스님에게 듣는 ‘무아’
경북 봉화는 서울에서 멀다. 일상의 감옥인 직장과 집에서 멀어진다. 아무리 멀어지고, 어디로 떠나도 ‘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어디로 떠나건 ‘나’는 언제나 거기에 와 있다. 일상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로부터 탈출하지는 못한다. 서울 동서울터미널을 떠난 버스가 두 시간이 지나 경북 영주쯤을 지날 때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21일 동짓날이었다. 대지의 온갖 것들을 깡그리 덮어버리려는 듯 함박눈이 쏟아진다. 천지가 일색이니 만물이 하나다. 그러나 눈이 그치고 햇살 비추면 대지는 소복을 벗고, 세상의 온갖 만물들은 저의 나신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동토에서 죽은 듯 누워 있는 것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제 생명을 발산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 군상들은 용광로처럼 욕망을 뿜으며 아귀다툼을 벌일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승리의 나팔을 불며 뽐내고, 누구는 제풀에 나자빠져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다. 그래서 승리자도 패배자도 마침내 함께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아비규환의 시대를 살아가느라 저마다 ‘나’를 위로받고, ‘나’를 힐링하는 게 무엇보다 절박한 시대다. 그런데 그런 시대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른 이를 찾아가는 중이다. ‘나로부터 벗어나라’는 이를. 터미널까지 차 몰고와 마중평소 자기 옷도 직접 빨아 입어
‘수행 따로, 일 따로’ 풍토 거부 무아에 이르는 ‘연기’ ‘중도’ 강조
갑자기 손바닥 펼쳐보이며
“손등이 있는가, 없는가?” 물어
상대가 없다면 나머지 한쪽도 없어
서로서로 의지하는 게 존재 실상 “양극단의 사고에 빠져서
자기만 챙기면 유리할 것 같지만
거기서 벗어날 때 더 큰 이익 얻어” 봉화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노승이 보인다. 고우(75) 스님이다. 서울에서 온 보살들을 배웅해주고, 또다른 객을 마중하러 직접 차를 몰고 온 것이다. ‘나란 없다’는 ‘무아’(無我)를 이야기하면서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왕처럼 앉아 3배를 받는 것으로 ‘유아독존’(唯我獨尊)을 과시하는 일부 승려상에 대한 세간의 거부감마저 일거에 녹일 만큼 허심탄회한 모습이다. 젊은 승려건 재가자건 보살이건 누구에게나 ‘경어’를 쓰며 무차별하는 노승을 본 뒤에야 드디어 ‘권위’와 ‘아성’에서 해탈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스친다. 고우 스님이 꼭 객에 대한 배려 때문에 터미널까지 나온 것만은 아니다. 고우 스님이 자동차 면허를 딴 것은 불과 4년 전이다. 70살을 훌쩍 넘어서야 운전을 시작한 그는 운전하는 쏠쏠한 재미에 빠져 있다. 이토록 미끄러운 산길을 초보운전 실력으로 달려올 정도다. 그는 또 해외 배낭여행을 시작해보고 싶은 꿈을 꾸는 청춘이다. 그 나이에 보여지기 마련인 노인과 노승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가. 봉화읍에서 20여분을 달리니 문수산의 좁은 산길이다. 길이 미끄러운데도 스님은 요령껏 잘 올라선다. 좁은 고갯길에서 누군가 눈을 쓸고 있다. 부엌살림을 맡은 공양주 보살 말고도 요즘 금봉암엔 두 명의 ‘보살’(여신자)이 동안거(겨울 3개월 동안 집중 참선 수행)를 나겠다고 올라와 있다. 통상 수행하는 이들은 일상을 무시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행처라고 하더라도 먹지 않고 청소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수행자들이라고 비켜갈 리 만무하다. 고우 스님은 ‘나만 잘되면 그만이다는 의식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도의 문에 들어설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한다. 지금도 자기 옷은 직접 빨며 솔선수범하는 그다. ‘수행하는 사람 따로, 일하는 사람 따로’의 풍토는 용납되지 않는다. 참선을 하러 온 보살선객들도 공양주와 다름없이 일하며 수행하는 이유다. 수행자는 어디 있고, 공양주는 어디에 있는가. 금봉암에 들어서니 진돗개인 하얀 진돌이가 스님에게 꼬리를 흔들고 펄쩍펄쩍 뛰며 달려든다. 꾀돌이 같은 진돌이에 비해 둔해 보이는 금돌이는 묶여 있다. 몇달 전 진돌이를 따라나선 금돌이가 올무에 걸려 중상을 입고 돌아왔다. 다리가 거의 절단될 뻔했다. 공양주보살은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진돌이가 금돌이를 꼬여 산에 데려가 혼자 떨쳐두고 돌아오곤 한다고 했다. 이 고적한 암자에서 유일한 종족이자 벗조차 경쟁 상대로만 여겨 내치려는 작태를 어찌 개에게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공양방(식당)에서 동지죽 공양을 마치고 스님이 홀로 지내는 암자에 마주앉는다. 스님의 법문이 구름 사이로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당이 훤히 내다보이는 유리문 밖으로 잔디들이 보인다. “저 잔디만 보는 사람은 어떤 잔디는 길고 어떤 잔디는 짧다고 볼 것이다. 그러나 잔디밭에 불을 질러버리면 잔디가 길고 짧은 게 아니라 그 배경인 땅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잔디엔 차별이 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잔디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것을 직시하게 한 것이다. 세상은 차별과 격차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너와 나의 개성만이 강조되는 이때,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차별도 없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공리주의와 전체주의를 거쳐 개인주의가 극에 달한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의 부정은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무아와 공(空)이 어찌 쉽사리 이해될 것인가. 그런데 어둠이 극하면 밝음에 이르던가. ‘무아’의 주창자인 그의 말을 경청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졌다. 성철 스님 탄생 100돌을 맞아 조계종 중앙신도회 신하 불교인재개발원이 지난 6~10월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 강사로 초청한 이도 고우 스님이었다. 그가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을 재개할 적임자로 꼽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는 불교의 핵심인 ‘연기(緣起)와 중도(中道)’에 대해 성철 스님이 명쾌히 밝힌 <백일법문>을 정독할 것을 수십년째 권유해왔다. 그래서 성철 스님이 유아독존식의 불친절한 선승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도록 자상하게 이끈 최고의 이론가로도 재조명받는 데 일조했다. 그는 고난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면 무아를 깨쳐야 하고, 무아를 깨치려면 ‘연기·중도’를 알아야 하고, ‘연기·중도’를 바로 이해해야 불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연기·중도’에 대해 깨우쳐 주는 게 그의 소명이 됐다. 그가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묻는다. “손등이 있는가 없는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손바닥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이면의 손등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있다고 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한다. 손등이 없는 손바닥이 있을 리 없듯이 몸통이 없는 머리가, 머리가 없는 몸통이 있을 리 없다. 서로는 서로를 의지해서 있는 것이 존재의 실상이다. 연기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 있다’는 뜻이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라고 구분해 부를 이름도 없다. 반대로 남자가 없다면 여자란 구분도 있을 수 없다. 자식이 없는 부모, 부모 없는 자식, 남편 없는 아내, 아내 없는 남편, 사주 없는 고용자, 고용자 없는 사주, 국민 없는 대통령, 대통령 없는 국민, 여당 없는 야당, 야당이 없는 여당이 있을 수 없다. 죽음과 삶, 고통과 행복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없다면 나머지 한쪽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양쪽의 극단적 논리를 떠나는 것이 ‘중도’다. 이처럼 상대가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도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상대를 무시하고 적대시하고 없애려고만 드니 개인과 세상의 고통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스님은 진돌이와 금돌이처럼 사람들 간에 ‘관계’의 상처와 내적인 고통도 ‘너’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는 것을 망각해 ‘너를 부인한 채, 내가 있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비롯된다고 단언한다. 내가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니, 남을 무너뜨려서라도 나만 성공하고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해 이전투구를 일삼아 결국 모두가 불행한 세상을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립적이고 이원화된 생각을 떠나 본질의 세계에서 현상을 바라보면, 해와 달이 만물을 비추듯 차별의 눈이 아니라 자비와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전혀 없음을 깨달으면 상대와 비교해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 똥을 푸던 니제가 천하디천하다는 비하심을 거두고 당당한 주인공으로 거듭나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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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산 금봉암(경북 봉화)/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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