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이슈 】

[앙코르 내 인생] 한식당 주인서 드러머 된 서효석(73)씨--FROM 조선

자운영 추억 2011. 11. 19. 10:59

입력 : 2011.11.16 23:18

드럼 두드리면 가슴 뻥 뚫려… 병원, 요양원 등 전국 곳곳서 공연
40대 중반에 남편 먼저 보낸 후 시장 좌판 건어물 장사와
분식집·한식당 운영으로 세 자녀 키워내…
6년 전 '드러머 인생' 시작, 의정부 '한마음밴드' 최고령 단원
연주 직전 스틱 '딱 딱' 부딪칠 때 짜릿한 느낌 언제나 새로워

회기역 근처에서 분식점을 운영할 때. /서효석씨 제공
가끔 먼저 세상 떠난 남편 생각을 한다. 나는 요즘 틈날 때마다 집 근처 의정부문화원에 나와 드럼을 치고 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며 하늘나라에 있는 그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그래, 그동안 정말 고생했수. 마음껏 두드리며 맺혔던 것 다 풀고 나중에 나 있는 데로 오라"고 할까? 내 얼굴을 벌써 잊은 것은 아닐까. 이렇게 할머니로 변한 내 모습을 알아보기는 할까.

지난 30년 정신없이 살았다.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미국에 가서 돈 벌어 오겠다던 남편은 2년 만에 중풍을 맞아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세상을 떴다. 1982년 내 나이 마흔네 살 때였다. 아이 둘은 초등학교 다니고 있었고, 큰아이는 중학생이었다. 함경도에서 혈혈단신 내려온 남편은 남한에 일가친척이라고는 한 명도 없었다. 남은 우리 네 식구가 살아가려면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여자가 맨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맨 먼저 서울 휘경동의 동네 시장 한 귀퉁이에 좌판을 깔고 앉았다. 처음 김과 미역을 팔던 날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시장 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김 사세요." 그 짧은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전까지 고생을 모르고 살았다. 경기도 이천의 대농(大農) 집안에서 평탄하게 자라 공무원이던 남편과 결혼했다. 남편이 2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을 접고 모은 돈으로 포천에서 목장을 할 때는 떵떵거리고 살았다. 집 마당에 심어 놓은 관상수가 수십 그루였고, 실내에서 새 수십 마리를 키웠다. 하지만 평생 회계 관련 업무만 했던 남편은 목장 운영에 서툴렀다. 목장을 서둘러 접은 뒤 서울에서 직원 120명인 식품업체를 운영할 때도 괜찮았다. 자가용 타고 일주일씩 양평으로 휴가를 다녔다. 그러나 전국 도매상에 내보낸 오렌지 주스가 반품으로 돌아오고 그런 일이 몇 차례 겹치니 공장도 집도 다 넘어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옛날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사 수완은 조금씩 늘어갔다. 동네 사람 중에 단골도 생겨났고, 2년 만에 시장 좌판 신세를 벗어나 작은 식료품 가게를 운영할 정도가 됐다. 그렇게 또 몇 년이 지난 뒤 업종을 바꾸어 지하철 1호선 회기역 입구에 '훼밀리 분식'이란 식당을 열었다. 우리 분식집에서 국수·우동·라면을 먹으며 학교를 다닌 경희대 학생이 꽤 많았다. 가게는 조금씩 커져 '오성회관'이란 간판을 달고 테이블 100석이 넘는 한식당으로 바뀌었다. 그때 나는 아침 6시면 어김없이 가게에 나가 인근 회기역 광장을 쓸었다. 다른 가게 앞까지 다 깨끗하게 청소해 놓으니 인심 잃을 일이 없었다.

서효석씨가 지난 11일 의정부 문화원에서 밴드 연습을 마친 뒤 혼자 개인 연습에 여념이 없다. 그는 “드럼 덕분에 매일 설레는 기분을 맛본다”고 말했다. /신동흔 기자

그렇게 혼자 장사하며 아이들을 대학 졸업시키고 시집 장가 보냈다. 식당은 무릎이 시원치 않아 8년 전에 접었다. 그래도 집에만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복지관에 나가 컴퓨터를 배우고, 운동도 했다. 6년쯤 전 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드럼이 나한테 딱 맞았다. 흥에 겨워 신나게 스틱을 휘두르며 스네어와 심벌을 힘껏 두드리고 나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렸다. 아팠던 기억이나 안 좋은 일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좋은 취미를 좀 더 일찍 시작하지 않았을까" 후회막급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러머'가 됐다. 늦은 만큼 더 부지런히 배워야 했다. 연습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인터넷에 들어가 '드럼 잘 치는 법'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드럼 관련 카페나 블로그에서 젊은 사람들이 올려놓은 글을 보면 꽤 유용했다. 악보에도 차츰 익숙해져 갔다. 요즘은 '필 인'이라고 하는 나만의 느낌을 담는 법도 살짝살짝 익힌다.

이제 나에게 드럼은 단순한 시간 때우기 수준의 취미는 아니다. 내가 소속된 의정부 문화원 실버 악단 '한마음 밴드'는 전국 곳곳으로 공연을 다닌다. 소위 '액티브 시니어'들로 구성됐고,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지금까지 공연 횟수가 48회나 된다. 초창기에는 공연이 많지 않았지만,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병원이나 요양원, 장애인 시설 등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오라는 곳이 있다. 작년에는 울산에서 열린 전국 경연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상을 받지는 못했다.

내 특기는 템포가 빠른 곡이다. 마음속으로야 로큰롤을 포함해 다양한 음악을 추구하지만, '사랑의 트위스트' '뿐이고' 같은 트로트 음악이 공연 레퍼토리다. 매번 연주를 시작하기에 앞서 '딱 딱' 드럼 스틱을 맞부딪칠 때 그 느낌이 좋다. 항상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이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정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