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스포츠】

[Why] [김신영 기자의 클로즈업(closeup)] 소리, 활을 내려놓으니 그 때 몸이 찾아내더라

자운영 추억 2013. 11. 3. 10:21

 

입력 : 2013.11.02 03:14

5년 부상 털고 컴백 성공… '바이올린의 女帝' 정경화
지금이 내 전성기 - 손가락 부상으로 휴식 5년… 완벽주의 집착 내려놓으니
소리가 편안하게 나오더라… 소리 낼 수 있는 몸이 됐지
"한국 콘서트홀 음향 낙후… 세계가 부러워할 음악당 짓는데 여생 바칠것"
둥글둥글해진 천재 - 지난달 中공연 관객 산만해 연주 멈추고 분위기 잡았어
옛날 같으면 난리쳤을텐데 다시 집중 기분좋게 마쳤지
하나님이 뒤늦게 준 선물 - 지금의 반주자 케빈 케너… 정말 기막힌 소리를 내요
그와 함께하면 기운 팍팍… 새 곡 개발하고 싶어져요
바흐, 가장 존경 - 바흐의 걸작 '샤콘느'가 바이올린 曲이어서 감사…
부모님 작고때 추모곡으로 G선상의 아리아 들려드려
두 아들, 음악 안해도 행복 - 손에 땀이 많이 나 줄리아드 중퇴한 큰아들
美서 금융인으로 살고있고 작은 아들은 구글 다녀요

바이올린 활이 멈췄다. 객석이 흠칫했다. 10월 18일 중국 베이징(北京) 국가대극원 무대에 선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65)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관중석을 쏘아보았다. 극장 안이 휴대폰과 발소리 같은 잡음으로 어수선하자 이 거장은 연주를 끊었다.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5번 '봄'은 시작한 지 5초 만에 그렇게 중단됐다. 정경화는 날카롭게 극장 안을 돌아보며 1분여를 서 있다가 반주자인 케빈 케너(50)에게 '다시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봄'이 처음부터 다시 흘렀다.

바이올린 여제(女帝)라 불리는 정경화를 콘서트 다음 날 아침 베이징 한 호텔에서 기다리며 조금 불안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연주자가 무대에서 연주를 멈추는 일이 유쾌할 리 없다. 몹시 날카롭지 않을까 걱정됐다. 정경화는 예로부터 완벽주의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 명성은 종종 악명이었다. 젊은 시절 연주가 맘에 들지 않으면 복도에 나와 벽에 머리를 쿵쿵 받았고, 무대 뒤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정경화는 약속 시각인 오전 10시에 정확히 호텔 라운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갈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가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인사를 건네자 활짝 웃었다. "봤지? 그거 봤지? 어제 멈추고 다시 한 거 말이야. (콘서트홀 안) 분위기가 너무 산만해가지고, 그거 잡느라고 그랬지. 그런데 결국 딱 잡혔잖아, 하하."

이 나이 든 천재는 유쾌하고 편안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을 서늘하게 했던 뾰족하고 무서운 정경화는 잘 보이지 않았다. 기르는 강아지 이야기가 나오자 애인 자랑하듯 설레는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두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영락없이 주책 맞은 한국 아주머니였다. 그는 일본 도시 4개, 중국 도시 7개, 한국 도시 4개로 이어지는 아시아 투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이번 투어는 2005년 손가락 부상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한동안 쉬었던 정경화가 무대로 돌아왔음을 세계에 알리는 선포식이다.

정경화는 1967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핑커스 주커먼과 공동 1위를 하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원조 '월드 스타'였다. 그 후로 약 40년 동안 정상의 자리에서 세계무대를 누볐다. 그는 "공백기를 지내며 편안하고 자유로워졌다. 이것 봐라. 이제 머리도 다시 못 기를 것 같다"면서 창백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바이올린을 놓았던 시간은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 불리던 정경화에게 무엇을 남기고, 또 가져간 것일까.


	10월 18일 중국 베이징 국가대극원 공연에서 정경화가 앙코르를 요구하는 박수를 받고 환하게 웃는 모습.
젊었을 때 ‘바이올린을 든 마녀’라 불리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얼굴이 왜 이렇게 편안해졌을까. 10월 18일 중국 베이징(北京) 국가대극원 공연에서 정경화가 앙코르를 요구하는 박수를 받고 환하게 웃는 모습. / CMI

◇"야… 정말 지독스럽게도 잘했구나"

자리를 잡고 나서 정경화는 대뜸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첫 질문부터 난제(難題)였다. "어제 사운드(음향)는 어땠어요?" "제 귀에는 좀 작게 들렸는데요…."

정경화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세자르 프랑크 1악장 마지막 '사악' 하고 끊기잖아. 그거 들렸어요?" "들렸던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의상은 어땠나" "'사랑의 인사'는 소리가 괜찮았나" "중국 관객이 모차르트를 가장 소화 못 하는 것 같지 않나"…. 전날 연주에 대한 질문을 빠르게 쏘아대고 나서 정경화가 말했다. "오케이! 질문!"

―어제 연주 때 멈춘 것, 내내 신경 쓰이진 않던가요?

"환풍기 소리가 엄청나게 크고, 관객들은 딴짓하고 있고….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 '이걸 어떻게 잡아야지 되나' 고민을 좀 했죠.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내가 '뜨르릉!' 하고 확 멈춰버렸지. 옛날 같았으면 당연히 그 지경이 되면 내가 기절을 할 듯 화를 내고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 이거 안 되겠구먼' 싶어 멈췄고, 그러고 나서 다시 곡에 집중해서 기분 좋게 연주를 마쳤다 이거예요. 아무렇지 않았어요."

―성격이 원만해진 건가요?

"5년 동안 바이올린 연주를 쉬면서 인생을 돌아보고 나름대로 정리를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무슨 뜻으로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생각했고, '화(禍)가 복이 된다'라던 어머니(이원숙씨·2011년 작고) 말씀도 수만번 떠올리며 지냈어요. 예전엔 무언가를 완벽하게 쫓아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그런 채찍질을 잠시 멈추니까 마음이 편안해."

―5년 동안 쉬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어쩌다 입으셨습니까.

"2005년 공연을 하려는데 왼손 둘째 손가락 근육이 조금 아팠어요. 연주는 해야겠어서 병원에 가서 코티손 주사(일종의 무통 주사)를 맞았는데, 그게 문제였어요. 아프지 않기에 그냥 연주한 것이 근육에 무리를 주어서 둘째 손가락 근육이 완전히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당시 C형 간염 약물치료를 길게 받고 난 다음이라 체질이 많이 바뀐 상태였어요. 거기다 주사제까지 넣으니 손(근육)이 꺾여 버린 거죠."

―손가락 보험은 안 드셨어요?

"에이… 그런 거 안 들어요. 혹여라도 그런 얘기를 누가 꺼내면 어머니는 그랬어요. '보험은 하나님한테 드는 거다. 뭐하러 보험을 드느냐'고. 난 준비를 잘 안 합니다.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거예요."

바이올린은 엄지를 제외한 왼손 손가락 네 개로 현(絃)을 짚어 음을 만들어낸다. 이 중 둘째 손가락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왼손 둘째 손가락을 못쓰게 되었다는 것은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가 아킬레스건을 다친 것과 비교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다.

정경화는 "당시 나이가 쉰일곱으로 적지 않았다. 연주를 이제 그만둘 때라는 생각에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부상과 맞닥뜨린 정경화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시간을 보냈다. 미국 뉴욕에 있는 줄리아드학교에서 많게는 동시에 열명을 제자로 삼고 교육자로서 다른 삶을 살았다. 3년쯤 지났을 때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는 걸 느꼈고 연습 끝에 2010년 내한한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하며 무대로 조심스럽게 돌아왔다. 이후 대관령 국제음악제와 크고 작은 리사이틀 무대에 간헐적으로 서 온 그는 11월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가질 콘서트를 '공식 소개 무대'라고 불렀다. 부상 후 무대에 서기 시작한 2010년부터 지금까지 연주는 '준비운동'으로 볼 수 있고, 이번 무대를 통해 '확실하게 궤도에 오른 정경화'를 소개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얼마 전 한 기사 인터뷰에서 동생인 정명훈(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이 '누나 정경화는 떠난 적이 없었다'고 했더라는 말을 꺼냈다. 정경화는 "무슨 소리! 난 완전히 은퇴했었다고!"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은퇴 선언을 한 건 아니었잖아요.

"손 부상을 당해서 무대를 떠난 상황에 은퇴를 무슨 선언까지 합니까. 그러나 나는 완전한 은퇴라고 생각했어요."

―5년간 바이올린을 쉬니까 어떻던가요?

"무대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여유 있게 제 예전 연주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 저는 제 음반을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거슬리는 부분이 자꾸 들려 신경질이 나고 소름이 끼쳐서…. 그런데 아이들 레슨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내 음반을 들었죠. 손을 다쳐 시연해줄 방법이 없으니까, 음반을 들려주면서 '이렇게 연주하라'고 지시를 했던 겁니다."

―다시 들으니 어떻던가요.

"'야… 정말 지독스럽게도 잘했구나' 싶더라고. 특히 윌리엄 월턴의 협주곡 같은 경우는 내가 혼을 다해 연주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들어도 정말 대단했습니다."

정경화는 예전 음반 얘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소파 등받이에 쓰러지듯 털썩 몸을 기대고 숨을 골랐다. "아임 투 타이어드(나 너무 피곤해). 내가 내 칭찬을 하려니까 갑자기 피로해졌어." 그는 동석한 기획사 직원에게 물을 한잔 달라고 하더니 마시지도 않은 채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돌아와 말했다. "자, 다음 질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0월 18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2005년 손가락 부상을 당해 은퇴를 고민하다 다시 살아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10월 18일 중국 베이징(北京)의 한 호텔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전일 성공적인 베이징 공연을 마친 정경화는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을 멈췄더니 원하는 소리가 나더라”고 말했다. / 사진작가 장시앙

◇"삶은 몸으로 배워야 하더라"

바이올린 활을 놓았던 기간에 정경화는 소중한 사람을 여럿 떠나보냈다. 열두 살 정경화를 줄리아드로 이끌었던 칠 남매의 맏언니 명소씨(플루티스트)가 2007년, 정경화의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2011년에 세상을 떴다. 2007년엔 정경화의 음반 녹음을 맡아 했던 프로듀서 크리스토퍼 레이번이 사망했다. 정경화는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분들이 차례로 가셨다. 애 낳으면 기저귀 가는 엄마들만 보인다더니, 나이가 드니 떠나는 사람만 보이더라"고 했다.

―여러 슬픔을 한꺼번에 왔군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결국 삶이란 몸으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똑똑한 사람이 머리로 아무리 많은 것을 터득하더라도 경험을 통해 느끼는 것을 따라오기 어렵습니다. 인간은 하나하나가 직접 터득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특히 음악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겪고, 또 겪어야 합니다. 수학자라면 다르겠지만요. 저는 독일 작곡가 요하네스 브람스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브람스는 여행을 좋아했고 서민들 사이에 섞여 살았어요. 그렇게 나온 음악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정경화가 서울 구기동 집에서 함께 지내는 강아지 두 마리의 이름은 브람스의 이름을 빌린 요하네스, 그리고 클라라다. 클라라는 브람스가 흠모했던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 즉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에게서 딴 이름이다. 강아지 자랑을 하던 정경화는 자연스럽게 '바이올린보다 더 중요하다'는 두 아들 이야기로 넘어갔다. 그는 1984년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게트와 결혼해 아들 재곤, 유진을 낳았다. 큰아들은 시티그룹에서 일하고 있고 작은아들은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구글에 다닌다. 아들들은 모두 미국에 살고, 정경화는 서울 구기동과 뉴욕 집을 오가며 지낸다. 그는 "연말을 작은아들과 보내기로 했다"며 즐거워했다.

―아이들이 음악을 하지 않아서 섭섭하지 않나요?

"섭섭하긴요! 게네가 얼마나 행복한데요. 사실 큰아들은 바이올린을 해서 줄리아드에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삼개월 만에 '이건 아니다'며 그만두더라고요. 재곤이가 정말 음악적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손에 땀이 많이 나요. 그러니 안 되겠다 결정하고 딱 그만둔 것이지요. 얼마나 기가 막히게 똑똑합니까, 하하."

그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은 스물다섯 번을 쓴 '기가 막히게', 그다음은 '대단히'였다. 그만큼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러면서도 "요즘 가장 아쉬운 것은 체력이다. 기력이 달리는 게 느껴진다"고 아쉬워했다.

―기력이 쇠했다는 걸 언제 느끼시나요?

"아이고… 김 기자가 예순다섯 살이면 그런 질문을 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 나이가 되면 아주 그냥 힘이 없습니다. 중국 신문에 실린 내 기사를 보니까 나이를 예순셋으로 썼어요. 예순다섯이라고 하면 너무 끔찍해 보여서 알아서 (나이를) 깎아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도 기사에 나오는 '63'이란 숫자를 보니까 '윽!'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옵디다. '윽! 이런 노인네가 왜 콘서트를 해!' 남이라면 나도 이러겠더라고. 아마 예술의전당에 오는 한국 관객들도 그런 마음일 겁니다. '이 할망구, 얼마나 하나 어디 보자' 하는 마음요."

―'전(前)만 못하다'는 소리 나올까 봐 불안하지는 않으세요?

"나는 '절정이 지나면 그만두겠다'고 오래전부터 얘기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나는 다시 컴백해서 연주하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꿈속에서 사는 기분입니다. 나에겐 지금이 최고이고, 절정이지요. 사실 2011년에 (반주자) 케빈 케너와 함께 연주하기 시작하면서 '이 나이에 삼년이나 더 할까?' 그랬어요. 벌써 그 삼년이 다 되어 가지 않습니까."

―머리를 벽에 받고 하던 '완벽주의자 정경화'는 사라진 건가요?

"나는 손가락 부상으로 쉬면서 '인간은 원래 헤매는 것이다'라는 답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헤매더라도 그냥 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들이 모조리 안 한 것들이더라 이겁니다. 실수할까 싶어 주저했던 것들 말이죠."

―천재도 헤매나요?

"내가 말하는 헤맨다는 것은 그냥 헤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정신없이 헤맬 때도 있겠고요. 내가 지독스럽게 악기를 쫓고 그랬을 때도 얼마나 헤맸는지 말도 못 합니다. 내 머리가 원하는 것과 내 몸이 따라가는 속도가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나 스스로 지나치게 저자세가 되어 살았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손을 못 움직이게 되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완벽하게 하려고 망설이면서 안 하는 것보다는 헤매더라도 하는 게 낫다'고. 움직일 수 있을 때 말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찾아 헤매고 계신가요?

"요즘엔 '중간 음'이 그렇게 좋습니다. '인간의 목소리'에 가까운 소리, 중간 음색이 가장 아름답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요즘은 중간 음색을 내는 비올라를 배우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지금 있는 곳에 충실하고, 저기를 바라보라'고 가르치셨는데, 바이올린 주자로 은퇴한 후엔 비올라로 실내악곡을 연주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아, 그리고 또 하나. 이번 기사를 통해 선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한국 콘서트홀의 음향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너무 뒤떨어집니다. 누가 봐도 기가 막히게 부러워할 만한 콘서트홀을 한국에 짓기 위해 목숨이 붙어 있는 때까지는 노력하겠습니다. 나를 도와줄 사람들은 당장 연락주세요!"


	2004년 9월 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마친 ‘정 트리오’가 어머니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는 모습. 왼쪽부터 정명훈(피아노), 정경화(바이올린), 어머니 이원숙, 정명화(첼로)씨.
정경화가 치명적인 손가락 부상을 당하기 얼마 전인 2004년 9월 4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를 마친 ‘정 트리오’가 어머니와 함께 관객에게 인사하는 모습. 왼쪽부터 정명훈(피아노), 정경화(바이올린), 어머니 이원숙, 정명화(첼로)씨. / 이명원 기자
◇"채찍질을 멈췄다. 소리가 나왔다"

정경화는 언니이자 첼리스트인 정명화씨와 2011년 대관령 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함께 맡으면서 본격적인 컴백을 모색했다. 그해 대관령에서 정경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라고 묘사하는 지금의 반주자 케빈 케너를 만난다. 쇼팽 콩쿠르 특별상, 차이콥스키 콩쿠르 동메달 수상자인 미국인 케너는 정경화가 함께 해보자고 제안하자 "영광입니다"라며 수락했다고 한다. 정경화는 "케빈과 실내악곡을 더 개발하고 싶은 바람이 지금의 나를 이끄는 큰 힘"이라고 말했다.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를 부활시켰다는 뜻인가요?

"난 예전에 실내악 이중주를 하면서 피아니스트 때문에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피아니스트가 그렇게 시간이 나지가 않아요. 또 이 사람들의 자아(自我)와 싸우는 게 정말 짜증이 납니다. 그 고집! 그 자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라두 루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스티븐 코바세비치…. 이 피아노의 대가들은 나한테 시간은 쥐꼬리만큼만 주고 그거라도 받으면 황송해하라는 식이었죠. 나도 성격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프로젝트는 대부분 오래 못 갔습니다. 그러던 제가 뒤늦게 케빈을 만난 겁니다. 당연히 기운이 팍팍 나지요."

―뭐가 그렇게 맘에 드십니까.

"기가 막힌 소리를 냅니다. 난 대관령에서 그가 쇼팽을 연주하는 걸 처음 듣고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어제 공연에서도 프랑크 1악장 마지막에 '사악' 하고 끊기지 않습니까. 대가들도 그게 안 돼서 짜증을 내는데, 그는 매번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소리를 냅니다. 기가 막히지요. 게다가 저를 참 잘 따르고요."

―작은 소리를 잘 내야 고수(高手)인가요?

"'어디서 소리가 나지?' 싶은 작은 고음(高音)이 최고의 고음이지요. 난 그걸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1982년 10월)를 보다가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뉴욕 카네기홀에 앉아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을 들으려는데 옆 건물에서 '스으으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두리번거렸죠. 그러다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졌어요. 카라얀이 들릴 듯 말 듯한 그 소리를 무대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던 겁니다. 역시 카라얀 아닙니까?"

―선생님은 그 경지에 이르셨나요?

"예전엔 그 소리가 머릿속에는 들리는데 몸으로 구현되지 않아서 괴로워했습니다. 활이 덜덜덜 떨리고 두근두근하고… 기절을 하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집착을 버리고 채찍질을 멈추니까 그 소리가 의식하지 않고 편안히 나옵니다.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몸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아픔은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산다"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기획사 직원이 정경화에게 "곧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했다. 3일 뒤인 지난 21일 중국 선전(深�)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어 바삐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뭐? 아직이야. 방에서 내 짐 챙겨서 1층으로 가 있어. 바이올린만 놔두고"라고 했다. "어서 더 물어보세요!"

―부러운 사람 있나요?

"글 쓰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문학가 혹은 문학을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보십시오. 등장인물 한명 한명이 얼마나 생생하고 상징적입니까. 그리고 셰익스피어! 비극도, 희극도 기가 막히게 그려내는 그런 천재가 어떻게 지구에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는 누군가요.

"'지구에서 딱 하나 내놓을 음악가가 누구냐'고 하면 바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흐의 기가 막힌 마스터피스(걸작)가 바이올린 곡이라는 겁니다. 파르티타 2번, 샤콘느 말이죠."

―아버지, 어머니를 추모하면서도 바흐를 연주하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1980년) 자꾸 추모 연주를 한 곡 하라고 하더군요. 사람들 앞에선 싫고 아버지에게 뭘 들려 드리고는 싶고…. 그래서 사람들을 모두 나가라고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저만 남은 장례식장에서 바흐의 'G 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했습니다. 한동안 감히 그 곡에 손을 못 대다가 10년 후 한국에 와서 다시 연주를 했어요. 그리고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또다시 그 아리아를 했죠. 정말 신기한 게 인간은 아픔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살죠."

―동생인 정명훈씨에 대해 '만 퍼센트 노력'이라고 하신 적 있죠. 선생님은요?

"저요? 저는 거기다 댈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서 해석하세요."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예술이 무엇이냐 하면… 예술의 힘은 육감(六感)에서 오고, 차원이 다른 것이고, 엄청난 수양을 통해서 터득할 수 있는 '혼 놀음'이고…."

정경화는 이런 알듯 모를듯한 답을 남기고는 시계를 보더니 "나 이제 간다!"라며 신선(神仙)처럼 휙 자리를 떴다.

1973년 2억6000만원에 산 과르니에리… 現 시가 최소 166억원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가 쓰는 바이올린은 1735년산 '과르니에리 델 제수'(과르니에리)다. 바이올린 거장 얀 쿠벨릭과 마이클 라빈의 손을 거친 명기(名器)로 음악계에서는 '쿠벨릭 과르니에리'라고 흔히 불린다. 18세기 초 활동한 이탈리아 바이올린 장인 주세페 과르니에리가 만든 바이올린은 세계에 200대가 채 남아 있지 않다고 알려졌다. 그나마 실제로 연주되는 것은 20대 정도다. 정경화는 과르니에리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스트라디바리우스를 1967년에 사서 쓰다가 스물다섯 살 때였던 1973년 악기를 과르니에리로 바꿔 지금까지 쓰고 있다. 당시 이 악기 가격은 약 25만달러(약 2억6000만원)였다.

정경화는 악기를 사느라 낸 빚을 10년 넘게 갚았다. 악기 때문에 돈을 아끼려고 삼류 호텔을 전전하다가 누군가 알아보면 창피해서 "정경화 아닌데요"라고 도망쳤다고 한다. 정경화는 "어릴 때는 고음에 끌렸고 그다음에 (좋아하는 음이) 저음으로 갔는데 과르니에리 소리가 거기 더 맞았다. 또 '예수의'라는 뜻의 '델 제수'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심이 깊은 과르니에리의 성정(性情)에 끌린 면도 있다"고 말했다. '델 제수'는 과르니에리가 자신을 스스로 부를 때 썼던 일종의 호(號)로 과르니에리는 악기에 십자가와 함께 '과르니에리 델 제수'라는 말을 새겨 넣었다.

정경화가 쓰는 과르니에리의 시가(時價)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지만 샀을 때보다 어마어마하게 올랐음은 거의 확실하다. 올해 초 영국에서 익명의 음악 후원가에게 팔린 후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앤 아키코 메이어스에게 무료로 대여된 과르니에리는 판매가가 최소 980만파운드(약 166억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