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로 장생이 등장한 KB리그 최철한(SK에너지 왼쪽)과 안성준(정관장)의 대국. 장생은 100만 판을 두어도 나오지 않는다는 희귀 형태로 ‘길조’로 여겨진다. [사진 한국기원]
한국 바둑 사상 처음으로 ‘장생(長生)’이 출현했다. 무대는 2013 KB리그 최철한(SK에너지) 대 안성준(정관장)의 대결. 당일 심판이었던 강훈 9단은 바둑 룰에 있는 ‘동형 반복 금지의 원칙’에 따라 무승부를 선언했다. 이 바람에 바둑TV로 생중계되던 이 대국은 불과 40분, 89수 만에 종료됐다. 장생은 길조이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장생은 너무 희귀해 실체를 목격하기는 힘들다. 조훈현 9단도 “프로 생활 50년 동안 장생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역사상 최초의 장생은 1993년 일본 본인방전 본선 린하이펑 대 고마쓰 히데키전에서 처음 등장했고, 2009년 후지쓰배 예선, 왕밍완 대 우치다 슈헤이전에서 두 번째로 나타났다. 중국에선 아직 보고된 바가 없다. 이번 최철한 대 안성준의 대국에서 나타난 장생은 공식적으로 국내 최초이며 바둑 사상 세 번째 기록이다.
바둑에서 영원히 동형 반복이 이뤄지는 형태는 ‘장생’과 ‘3패’ 두 가지가 있다(4패도 3패와 같은 것으로 친다). 중국 원(元)대의 바둑 책인 현현기경(玄玄棋經)에 전해지는 장생은 “오래 산다” 또는 “영원히 산다”는 의미를 띠고 있어 바둑계에선 길조로 친다. 기성 우칭위안 9단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장생은 100만 판을 두어도 생긴 일이 없다. 만일 생긴다면 경사스러운 일이므로 팥밥을 지어 축하해야 한다”고 했다.
3패는 흔히 불길한 것으로 여긴다. 16세기 말 일본 전국시대의 강자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혼노사(本能寺)란 절에서 당대의 바둑 고수인 닛카이와 리겐보의 대국을 감상한다. 치열했던 이 대국은 3패가 등장해 무승부가 됐는데 공교롭게도 그날 밤 오다는 부하의 모반으로 절에서 사망하고 이후 일본에선 3패를 흉조로 여기게 됐다. 그러나 정작 3패를 만든 닛카이(日海)는 바둑 4가문 중 하나인 본인방가(本因方家)의 개조가 됐고 본인방가는 이후 300년 동안 일본 최강의 가문으로 바둑에 큰 업적을 남긴다.
3패나 4패는 몇 년에 한 번씩 등장한다. 지난해 삼성화재배 32강전 이세돌 대 구리 대국에서 나타난 4패 무승부도 그중 하나다. 장생은 평생 한 번 보기 어렵다. 장생의 주인공이 된 최철한과 안성준은 무승부로 팀에 기여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면서도 “장생이 그토록 경사스러운 일이라니 영광이다”고 말했다. SK 에너지와 정관장은 팀 대결에서도 2승2패1무승부가 돼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박치문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