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 食 】

‘술의 혼’ 누룩, 시간이 괴어 ‘전통’이 익는다

자운영 추억 2013. 10. 12. 18:11

 

등록 :

진주곡자공업연구소, 외조부 아버지 이어 3대째
일본식 누룩과는 달리 자연이 빚어 풍미가 오묘

발효실에 펼쳐져 있는 누룩들.

낮은 지붕, 부서진 시멘트, 무성한 잡풀. 세월의 고즈넉한 흔적이 역력하다. 지난 3일, 경남 진주시 상평동에 있는 ‘진주곡자공업연구소’(이하 진주곡자)를 찾았다. 문패만 봐서는 도통 뭘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드르륵 드르륵, 철제 대문이 열리자 이진형(41) 부장이 나온다. 진주곡자 이원휘 대표의 아들로 이곳을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이다. 그가 회백색 방으로 소매를 잡아끈다. 만든 지 꽤 오래 되어 보이는 문짝이 보인다. 매우 고풍스럽다.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훅 달려든다. ‘낭만’을 굳이 갖다 붙이면 비치파라솔 아래서 즐기는 여름날 열기 같다.

전통식은 가루를 뭉쳐 만드는 떡누룩…일본식은 균 따로 배양해 뿌려

“냄새가 시큼하죠? 누룩이 잘 숙성되고 있어요.” 이씨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진주곡자공업연구소’는 누룩을 생산하는 회사다. 이곳의 누룩은 특별하다. 상주곡자(경북 상주), 송학곡자(광주광역시)와 함께 우리 전통방식으로 만든 누룩을 제조하고 공급하는 업체다.

발효실에 서 있는 이진형 부장.

술을 빚을 때 쓰는 발효제인 누룩은 술의 맛과 향을 좌지우지한다. ‘술의 혼’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을 정도다. 우리 전통 누룩은 자연의 맛을 그대로 담는다.

공장장이 안내를 한다. “밀가루를 여기에 넣어요.” 재료는 밀가루다. 빻은 밀가루는 철제 통으로 들어간다. 그것과 연결된 관에서 물이 나오면 한 몸이 된다. 그 덩어리는 기계 구멍을 통과해 오목한 바닥에 떨어진다. “아줌마(종업원)들이 반죽해 보자기에 싸고 그걸 이 틀에 넣어요.” 틀은 테두리가 8각형이지만 안은 원형이다. 꽉꽉 밟는 과정을 거쳐 발효실로 간다. 이씨가 문을 열어준 방은 발효실이었다. 약 18개의 방에는 대략 2000장 정도의 누룩 덩어리가 있다.

가루를 뭉쳐 일정한 형태로 성형해 만드는 누룩을 떡누룩이라고 한다. 형태상 분류다. 진주곡자에서는 떡누룩을 만든다. “보름 이상 발효, 건조시켜요. (과거) 일본식 누룩처럼 균을 배양해서 가루에 입히는 식이 아닙니다.” 일본식 누룩은 찐 쌀가루에 배양한 곰팡이를 뿌려 만든다.

발효실에 들어간 누룩 덩어리는 20~30일 사이 여러 번 뒤집기를 반복한다. 미생물이 골고루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의 손에서 탄생한 맛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한 풍미를 자랑한다. 술에 고스란히 옮겨간다.

계절이나 시간까지 따져 누룩 띄워…6월이 알맞춤

이씨는 어린시절 시큼한 냄새를 맡고 자랐다. 누룩은 그에게 장난감 이상으로 정겨운 것들이었다. “어릴 때 누룩방을열면 연기가 막 났어요. 친구들은 (그 연기가 잔뜩 묻은) 나에게 빵 냄새냐고 물었어요.” ‘진주곡자공업연구소’는 그의 아버지 이원휘(76) 가 1977년께 붙인 이름이다. 그의 외조부, 최이형씨가 이전부터 운영하던 회사를 사위였던 부친 원휘씨가 이은 것이다.

발효와 건조가 끝난 누룩(왼쪽)과 누룩 틀.

누룩의 주재료는 밀이지만 쌀이나 보리 등으로도 만든다. 밀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서는 옥수수, 콩, 팥, 귀리 등을 섞어 만들기도 했다. 주로 강원도나 북쪽 지방의 풍경이다. 우리 선조들은 누룩을 띄울 때 계절이나 시간까지도 따졌다. 섬세한 발효의 원리를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6월은 술보다 누룩을 빚는 데 적당한 달’이라고 적혀있다. <증보산림경제>, <음식디미방> 등 우리 고문서에는 누룩에 관한 꼼꼼한 기록들이 많다.

일제 강점기에 주세법이 실시되고 술의 면허도 국가가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바뀌면서 우리 가양주는 사라져 갔다. 집집마다 만들던 술이 사라지면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누룩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에도 양조장들은 발효 속도도 빠르고 만들기 간편한 일본식 누룩을 많이 썼다. 2000년대 막걸리 붐이 일면서 전통 누룩의 진가를 알아본 학자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최근에는 과거 다양했던 전통 누룩을 복원하기 위해 애쓰는 대형 양조업체도 생겼다.

빨리 만드는 것보다 제대로…최근 토종 ‘앉은뱅이밀’로 도전

이씨는 “과거 전통 누룩은 가격도 비쌌고, 질이 고르거나 (술 제조할 때) 안정적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다가 80년대는 누룩을 넣지 않아도 만들 수 있는 술들이 많이 개발되면서 국산 전통 누룩이 설 자리가 더 줄었죠”라고 말한다. 그는 식품성분표에 누룩이 식품첨가물이라고 표기되는 게 아쉽다. “천연조미제인 거죠. 앞으로도 자연발효 방식을 유지할 생각입니다.” 그의 철학은 분명하다. “빨리 막 만드는 것보다 제대로 잘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는 최근에 새로운 도전에도 나섰다.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 있는 <금곡정미소>의 우리 토종 밀 ‘앉은뱅이밀’로 누룩을 만들었다. “향이 그윽하고 질이 우수해요.” 배시시 웃는 모습이 푸근하기만 하다.

박미향 기자mh@hani.co.kr

※ 참고도서 <한국의 술문화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