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전통】

'북학의'는 조선실학자 '지식'의 집합체"

자운영 추억 2013. 7. 13. 09:40

완역 정본 북학의/ 안대회 지음·돌베개 발행, 544쪽·2만8,000원
이본 20종 수집 정리… 첫 한글 완역 정본 내
박제가 연구할수록 매력… 우리 현실 돌아볼 계기

  • 연합뉴스
입력시간 : 2013.07.12 21: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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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모습. 박제가는 사행을 통해 문인, 화가 등 많은 중국 명사와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과천문화원 소장
안대회(52)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몇 년 전 여러 학자와 함께 우리 고전 100종을 영어로 번역하려고 목록을 뽑은 적이 있었다.

세계의 인문학자들과 그곳의 독자들에게 우리 고전을 소개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막상 번역하려고 보니까 목록에 오른 고전 가운데 국내 연구가 제대로 돼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전을 번역하려면 일단 우리 텍스트가 정확한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번역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정본이라고 할 만한 표준 텍스트가 없었던 것이다. 안 교수는 그때부터 우리 고전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시급한 게 아니라 우리 자체의 기초 연구를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안 교수는 그 결과물로 최근 조선 후기 실학자 초정 박제가(1750∼1805)의 대표작 '북학의'의 한글 완역 정본을 내놨다.

<완역 정본 북학의>(돌베개 발행)는 국내는 물론 일본미국 등에 흩어져 있는 '북학의'의 이본(異本)들을 모두 수집해 차이나는 내용을 바로잡고 원문을 확정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 국내 최초의 정본이다.

안 교수는 이를 위해 20종의 '북학의' 이본을 일일이 살펴 쉼표 하나까지 세심하게 바로잡는 지난한 작업을 수행해야 했다. 안 교수는 2003년에 이미 선집 '북학의'를 출간한 바 있다. 당시 2∼3종류 정도의 이본을 대상으로 교감하고 번역했지만, 전체 이본을 대상으로 교감을 진행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더욱이 원문에 대한 텍스트 비평을 꼼꼼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10년 만에 다시 '북학의' 번역서를 낸 거죠. 사실 '북학의'는 조선시대에 나온 사상서를 포함해 고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북학의' 정본이 없다는 것에 대해 저 자신이 전공자로서 부끄러움과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자료를 모아서 정본 작업에 나선 거죠."

'북학의'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북쪽을 배우자는 논의'다. 세계로 향해 문호를 열어 우리보다 나은 문화와 제도, 기술을 배워서 부국강병과 윤택한 생활을 성취하자는 박제가의 주장을 담고 있다.

안 교수는 "이번 <완역 정본 북학의>는 초고본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여기에 20종의 이본을 가지고 교감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정본으로서 학자들이 신뢰하고 이용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자평했다.

여기에다 기존에 발생한 번역의 오류를 수정하고 번역도 오늘날 대중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썼다. 특히 단순한 번역물이 아니라 학술 번역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학술적인 주석에 공을 많이 들였다. 기존에 나와 있는 것들과 비교해 분량이 최소 2∼3배 정도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운송수단으로서 수레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수레를 '능행지옥(能行之屋)', 즉 '움직이는 집'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후에 나온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무릇 수레는… 땅 위를 다니는 배이자 움직이는 집이다(大凡車者,…用旱之舟而能行之屋也)"라고 했다.

수레를 '능행지옥'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도 없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이는 박제가와 박지원이 수레를 두고 생각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안 교수는 지적했다.

안 교수는 "'북학의'의 서문을 쓴 연암 박지원이 '능행지옥'이라는 표현을 옮겨 쓴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둘의 토론 중에 나온 말을 박제가가 먼저 쓴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의 사유가 굉장히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능행지옥'에서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는 '북학의'가 박제가 자신이 골방에 틀어박혀서 쓴 것이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과 수없이 토론하고 고민한 것에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녹여서 만든 저작물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안 교수는 '북학의'가 박제가 자신의 학문적 능력과 열정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성대중을 비롯한 동시대 학계의 지적 역량의 총화라고 본다.

비록 박제가의 개방 요구가 당시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한계가 있긴 하지만 '북학의'의 사유가 당시 지성인에게 미친 영향은 정말로 막대하다고 안 교수는 덧붙였다.

안 교수는 박제가와 관한 연구를 좀 더 진행해 단행본으로 낼 계획을 하고 있다. 박제가의 이용후생학, 박제가의 사상이 형성되게 된 배경, 박제가의 사상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 써볼 예정이다.

특히 학문의 근간이 정치학, 인문학인 조선사회에서 천민들이나 하는 기술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박제가의 혁명적인 면모를 소개할 계획이다. 안 교수가 동시대의 지식인인 박지원, 정약용에 비해 인기도 별로 없는 박제가 연구에 그토록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박제가의 선 굵은 사상에 호감이 가고 그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서 이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되는 것 같다"면서 "연구를 하면 할수록 매력을 느끼는 것이 이분의 사상이 쉽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꾸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고 했다.

안 교수는 "박제가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현실적인 의의가 있다"면서 "국제 정세가 안정된 시절에 주체적으로 개혁을 실행하지 못한다면 바로 국가 위기로 이어진다는 경고를 내리는 박제가의 목소리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추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사진설명1 / 중국 화가 나빙이 그린 박제가의 모습. 박제가는 사행을 통해 문인, 화가 등 많은 중국 명사와 폭넓은 교유관계를 맺었다. 과천문화원 소장

사진설명 2/ 안대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