卍 山과 寺

불교 기본용어 뜻

자운영 추억 2013. 1. 16. 21:48

사전에서 옮겨 온 글 + 편집

불교의 반야없이 하나님의 지식을 깨닫기 어렵고,

하나님의 지식없이 불교의 반야를 깨닫기 또한 어렵다.

그 목표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이에게만...

 

여래(如來)

그 원어의 정확한 의미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불교 주석서에는 대략 8가지의 설명이 제시되어 있다.   가장 널리 채택되는 해석은 '그렇게(如) 간(去) 이'라는 해석과 '그렇게(如) 온(來) 이'라는 해석이며, 양쪽 모두 역사상 석가모니가 과거 또는 미래에 깨달음을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거'(如去)라는 번역어가 쓰이는 경우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후기 대승불교에서 여래는 모든 사람에게 내면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본질인 불성(佛性)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진여(眞如)와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모든 중생은 그러한 여래를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에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여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참된 상태로서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궁극적 실재지칭하기도 한다.   여래, 불성, 진여는 견성의 대상으로서 기독교의 그리스도 빛에 해당하는 양심을 뜻한다.   해탈과 열반의 참된 시작점인 견성은 곧 자기 양심을 바로 본다는 뜻이다.   그 끝이 성불인 것이다.   성불심이 곧 보리심이다.

 

나무(南無)

부처나 보살의 명호 앞에 관사(冠詞)로 붙어있는 나무(南無)라는 말은 범어(梵語)의 Namasa를 음사(音寫)한 말로 귀명(歸命)이라 번역한다.   귀명이란 글자 그대로 신명(身命)을 던져 돌아가 의지함을 뜻한다.   모든 생명의 존재는 본연청정(本然淸淨)한 진여(眞如)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생명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에 의해 그 근원을 스스로 배반하고 거짓의 허상에 사로잡혀 번뇌와 속진(俗塵) 속에 살고 있다.   귀명은 이러한 거짓과 잘못을 던져버리고 본래의 진실, 옳음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다.   귀명이라 할 때의 (命)이라 함은 무엇과 비할 바 없는 목숨을 뜻하는 것이며, 이 목숨을 들어 본래에로 돌아가고자 함은 종교적 결단의 극(極)을 표하는 것이다. 귀명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귀투신명(歸投身命) 즉 신명을 던져 훌륭하고 옳은 것에 돌아가 의탁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귀순교명(歸順敎命)으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지시하는 바를 따름이요, 셋째는 환귀본명 (還歸本命)으로 본래의 세계로 환원을 의미한다.   불자가 매일매일 나무불법승(南無佛法僧)을 외는 것은 무명과 번뇌에 의해 그릇되어지는 자신의 생활태도를 반성하고 옳은 것으로 전환하고자 하는 다짐이다.   육체의 출생을 生이라 하며, 정신적인 출생 곧 거듭남을 木(나무)이라 한다. 이런 뜻으로 당신께 귀의한다 즉 양자 됨을 스스로 인정하는 뜻으로 나무라는 칭호를 대상 앞에 붙이는 것이다.   나무관세음보살 하면 관세음보살께 귀의한다는 뜻이며, 나무묘법연화경 하면 묘법연화경(법화경)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미타불 또는 무량수불(無量壽佛), 무량광불(無量光佛)은 서방 극락세계(西方極樂世界)에 머물며 설법을 한다는 부처로, 주로 정토종 불교에서 숭앙하는 구원불이다.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바(Amitabha), 즉 헤아릴 수 없는 광명을 가진 것(無量光)과 아미타유스(Amitayus), 즉 헤아릴 수 없는 수명을 가진 것(無量壽)이라는 두 종류의 원명의 음사(音寫)이며,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개의 덕성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 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원래 법장(法藏)이라는 비구승이었는데, 48개의 큰 서원을 세우고 오랜 수행끝에 서원을 모두 이룬 뒤 부처가 되어 극락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토종 근본 경전의 하나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따르면, 오랜 옛날 법장이라는 비구가 48개의 서원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18번째 서원에서 자신이 부처가 되면 그를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모두 그가 건설한 정토에 태어나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지복을 누리며 살게 하겠다고 맹세했다.   법장은 자신의 서원을 모두 이룬 뒤 아미타불로서 '극락'(極樂)이라는 서방 정토를 주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믿음을 강조하는 아미타불 신앙은 650년경부터 중국에서 널리 유행하기 시작했고, 곧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한국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아미타경소 阿彌陀經疏〉를 저술하면서 정토신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특정 종파에 한정되지 않고 불교신앙의 일반적인 형태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는 12세기에 형성된 정토종과 13세기에 형성된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

 

아미타불은 본래 인간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며, 법장을 아미타불이라 일컬음은 법장이 가장 아미타불의 본질 다웁다는 뜻으로 붙여준 칭호이다.   아미타불이란 조금도 세상의 때나 먼지가 묻지 않은 인생의 시작점의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이라 하는 말의 뜻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새롭게 원점에서 좋은 길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나무아미타불의 의미 : 1.아미타불에 귀의 합니다.   2.헤아릴 수 없는 광명에 귀의합니다.   3.헤아릴 수 없는 생명에 귀의합니다.

 

정토사상(淨土思想)

대승불교에서 정토에 왕생하는 것, 또는 정토를 실현하는 것과 관련된 사상 및 신앙. 정토사상은 흔히 불교에서 타력신앙(他力信仰)이라고 불린다.   불교는 원래 자신의 힘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려는 철저한 자력구원(自力救援)의 종교였다.   그러나 불교가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하면서 보편적인 구원의 이념에서 부처와 보살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타력구원(他力救援)의 사상으로 전환되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토사상이다.   이것은 "법에 의지하고 자신에 의지하라"(法燈明自燈明)는 석가모니의 유언과는 분명히 상반되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토신앙을 비롯한 여타의 타력신앙은 '자리(自利)가 곧 이타(利他)'라는 사상적 토대 위에서 성장한 대승불교의 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인도에서 정토사상은 대승불교의 발생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했다.

 

- 이상은 사전의 해석이고, 덧붙이자면, 소승이란 작은 수레 즉 한 사람의 구원방편을 뜻하고, 대승이란 큰 수레 즉 여러 사람의 구원방편을 뜻하는데, 불교가 소승적 수행방편을 추구하던 시기에는 혼자 자력구원을 목표로 삼아 모두가 스스로 독각승으로서 수행할 때이므로 남을 돕고 말고 할 이유나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한 마음 한 뜻으로 도와가며 수행하는 정토사상이 거론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대승적 수행방편을 추구하면서부터는 함께 수행하는 이들 간에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든 면에서 서로의 차이점이 나타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 가운데 나온 생각들이 곧 정토사상을 이룬 것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적 수행이란 본래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행위임으로 함께하는 인연을 결코 서로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 죽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면야 복잡하게 생각하고 말 것도 없겠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생명을 얻기 위한 목표로 수행하는 이라면 나만 잘 되겠다는 생각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리를 지어 함께 수행하는 형태를 띠면서 그 가운데 공부근기나 수행근기나 생활형편 등에서 나타난 차이점을 해결하기 위해, 좀 더 강하고 나은 자가 더 못한 자를 돕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자비심의 본질이다. 서로 돕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면, 나사렛 예수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모세로부터 시작된 모든 율법과 계명을 대신하여 "서로 사랑하라" 즉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대체하여 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준 단 하나의 새로운 계명인 것입니다.   정토사상의 서로 돕는 방편은 이와 같은 뜻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며, 불교사상에서 가장 고귀한 덕목인 것이다.   화쟁사상일심사상,[원효스님] 내외겸전사상[의천스님]돈오점수사상[지눌스님] 위에 정토사상이 존재하며,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결과를 얻게 하는 사상이다.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시온사상과 같은 불교의 정토사상은 서로 의롭게 생활하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수행정진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인간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덕목이며, 또한 필수적인 덕목이다.   새 생명을 위하여 그야말로 아낌 없이 베풀 수 있는 보살심, 즉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성도심이 없이는 새 세상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경들의 권고이자 나의 확신이다.

 

이와 같이 대승적 불교사상에 의해 필연적으로 나타난 무리 수행자의 등장과 함께, 서로 돕는 일은 수행자로서 당연한 행위였으므로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가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정토사상을 타력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도움을 받는 자의 측면만을 보고서 한 말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편견이다. 대승적 정토사상은 누군가가 자력신앙생활 중에 자기의 잉여분을 부족한 누구에게 아낌 없이 베푸는 것으로서 이를 의존의타적 타력신앙으로 볼 것이 아니라, 자비심으로 서로의 필요충족사항에 의한 공동분배적 보살신앙으로 나누어 주는 선한 행위로 보아야 한다.   이는 여럿이서 함께 수행함으로서만 얻을 수 있는 큰 유익이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시온사상과 같은 것으로서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이렇듯 한 마음 한 뜻으로 수행정진 할 수 있는 나눔과 베풀 수 있는 마음가짐이 없이는 새 세상에 갈 수 없다.

 

불교의 정토사상에 의한 서로돕는 보살행과 예수 그리스도교회의 시온사상에 의한 서로 사랑하는 성도행은 모든 재물과 물질과 육체의 목숨까지도 아낌 없이 서로 나누고 공유하는 흠 없는 일체감의 행위이며, 불교에서든 예수 그리스도교에서든 새 생명을 얻는 일에 필수적인 요구사항이다. 그러한 행위의 핵심은 서로 한 마음 한 뜻이 되는데 있다.   한 마음 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코 무리수행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로 융화단결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생명이라 하고, 서로 분리되어 나누이는 것을 죽음이라 한다.   한 사람의 몸도 나누면 죽고, 한 사람의 몸과 영, 혼, 맘이 나뉘어도 죽는다.   가정의 생명은 부부가 나뉘면 죽고, 지역의 생명은 의견이 나뉘면 죽고, 나라는 민족이 나뉘면 죽고, 국가는 땅이 나뉘면 죽어 있는 것이다.   나뉘는 것(죽음)은 탐심과 욕심 때문이므로, 하나로 연합하는 것(생명)은 탐심과 욕심을 버리면 되는 것이다.   종교의 모든 계와 율의 대상이 되는 본질이 바로 이 탐심과 욕심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생명은 옛 생명인 이 세상의 재물과 목숨을 버리므로서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버리되 자살행위식으로 버리지 말고 보살성도행으로 버리라는 것이 곧 정토사상이요, 시온사상인 것이다.   참보살상은 바로 온전한 정토사상에서 나온다.

 

비로자나(毘盧遮那)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약칭〈화엄경〉)을 주경 전으로 하는 화엄교의 교주로서 천엽(千葉)의 연화(蓮華)로 이루어진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있으며, 광명을 발하여 모든 법계를 비추고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 태양신에서 유래한 이상불(理想佛)로 광명편조(光明遍照)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 천태종(天台宗)· 법상종(法相宗) 등에서는 비로자나불·노사나불·석가모니불을 각각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 또는 화신(化身)의 3신(三身)으로 구별하여 취하기도 한다.   그리고 밀교의 주존인 대일여래(大日如來)도 비로자나불을 일컫는 것으로 일체의 부처와 보살의 본체가 되는 부처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의 형상이 도회(圖繪)된 것은 중앙 아시아, 둔황[敦煌], 윈강[雲岡], 룽먼[龍門] 등에서 5세기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불상의 예나 기록을 통하여 볼 때 늦어도 8세기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사나불(盧舍那佛)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신 공덕으로 나타나신 부처님으로 복과 덕이 가득하게 이 세상의 불쌍한 모든 사람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삼신불의 하나이신 보신불이라고도 한다.   비로사나 부처님(毘盧舍那佛)이라고 한다.   노사나불은 무량겁 동안 수행한 끝에 깨달음을 얻어서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莊嚴世界海)에 머물며, 털구멍마다에서 화신(化身)을 나투어 시방에 광명을 발하고 무량한 가르침을 베풀어 일체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관세음(觀世音)

범어 아바로키테스바라(Avalokitesvara)의 한역으로 세상을 관한다는 뜻으로 관자재보살의 명칭이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 · 관세자재보살(觀世自在菩薩) ·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관세음 · 관음보살이라고도 함('모든 곳을 살피는 분', '세상의 주인' 등을 뜻함).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 세상의 모든 중생이 해탈할 때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보살의 서원(誓願)을 가장 잘 보여준다.   불교의 여러 보살들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숙하며, 팔리어경전을 신행(信行)의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보살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좌부(上座部)불교에서조차 숭배할 만큼 모든 불교권에서 가장 널리 숭앙받고 있다.   그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으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며, 이 때문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에는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석가모니불의 입적 이후부터 미래불인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난파, 화재, 암살, 도둑, 사나운 짐승들에 의한 피해 등으로부터 세상을 지켜주며, 구제할 중생의 근기(根機:정신적 수준)에 맞추어 33가지의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다

 

대세지(大勢至)

대세지는 아미타불의 오른편 보처로 아미타불의 자비문 ·지혜문 중에서 관세음은 자비문을 표하고, 대세지는 지혜문을 표합니다.

 

보살(菩薩)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확정된 이'라는 뜻.   불교에서 역사상의 부처인 고타마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기 전의 상태, 또는 현세나 내세에서 부처가 되도록 확정되어 있는 다른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

 

대승불교에 이르러서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신의 궁극의 목표인 열반(涅槃)을 연기하겠다고 하는 보살의 서원(誓願)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이전의 소승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아라한(阿羅漢)이나 스승의 지도없이 홀로 깨달음에 이르는 독각불(獨覺佛)을 이상적 전형으로 삼고 있었으나, 대승불교에서는 그러한 전형들을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위와 같은 보살의 전형을 강력하게 내세워 그 위상을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보살의 개념은 자비(慈悲)의 가치를 지혜(智慧)의 가치에 대등하도록 고양시켜 주었다.   여기에서 보살은 특히 신도들에게 자신이 쌓은 공덕을 이전해 줌으로써 자비를 실천한다.   보살행과 정토사상은 뗄라야 뗄 수가 없고, 성도행과 시온사상도 뗄라야 뗄 수가 없다.

 

미륵보살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한다.   미륵보살은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죽었으며, 현재는 보살의 몸으로 도솔천(兜率天)에 머무르면서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또한 설화에 따르면 보살은 초발심 때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자씨보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일찍이 석가모니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는데, 도솔천에서 4,000세(인간세상에서는 56억 7,000만 년)의 수명이 다한 후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여, 3번에 걸친 설법으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라 했다.   이처럼 미래에 석가모니를 대신해 부처가 되어 설법한다는 의미에서 보처보살(補處菩薩)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부처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륵불·미륵여래라고도 한다.   이로 인하여 미륵보살과 미륵불을 나타내는 2가지 조상(彫像)이 있게 되었다.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은 크게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미륵상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현재 미륵보살이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는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상생신앙(上生信仰)이며, 다른 하나는 <미륵하생경>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미래에 미륵보살이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할 때에 그 세계에 태어나 설법에 참여함으로써 성불하고자 하는 하생신앙(下生信仰)이다.   상생신앙은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정토신앙이 흥성하면서 점차 쇠퇴했으나, 하생신앙은 역사를 통틀어 면면히 이어져왔는데, 특히 어지러운 시대에 성하게 일어났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시대가 지나가고 하루빨리 평화로운 미륵불의 세상이 오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는 하생신앙은 미륵불을 자칭하는 자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미륵보살신앙

미륵경에는 미륵상생경과 미륵하생경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미륵하생경은 미륵이 세상에 나와 구원한다는 신앙을 담고 있으며, 혁명사상을 내포하여 중국과 한국에서는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미륵신앙은 한국에서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민중속에 깊이 파고든 신앙인데, 그 이유는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미륵신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사무가에서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의 계략에 의해 세상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말한다.   현세를 대표한 석가모니와 다음세상, 새로운 세상을 대표하는 미륵이 대립한다고 불교에서는 이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