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이슈 】

[스크랩] 숲 속에서 거북이처럼 살다

자운영 추억 2012. 11. 3. 15:58

 

 
    구구산방에서 만난 도종환 시인
    숲 속에서 거북이처럼 살다 

   
충북 청주시 자택과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에 위치한 황토집 ‘구구산방’을 오가며
    아름다운 시심을 다듬고 있는 ‘접시꽃 당신’의 시인 도종환(57) 씨를 만났다.
    하늘은 맑아 쳐다볼라치면 마음이 송송 박히는 어느 일요일 구구산방을 찾았다.
    그는 흙과 자연 속에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삼면이 책으로 꽉 찬 도 시인의 서재에서.


고요한 자연, 구구산방에 들어가다 
자동차는 충북 청원군과 보은군의 경계인 피반령 고개를 넘어 회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파르지 않고 완만한, 구불구불한 길은 시선을 집중하게 했고 산등성이는 자꾸 곡선을 그리며 눈으로 파고들었다. 후배는 자율신경 균형이 깨져 생기는 ‘신경실조’라는 병에 걸린 그를 청주에서 싣고 차를 몰아온 것이다. 핸들이 돌기를 여러 차례. 오르막과 내리막의 교차를 여러 번 경험한 뒤에야 버섯 모양의 외딴 황토집에 닿을 수 있었다. 산속에 갇힌 형국이었다.
“여기서 지내세요.”
까마득히 몰려오는 몸의 고통에 둘러싸였던 그는 그렇게 황토집에 놓였다. 동네에서 한참 떨어져 오가는 사람은 없고, 온종일 새소리와 물소리 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낮은 적막했고 밤은 무서웠다. 혼자 먹고 치우며 누워야 했다. 고요한 자연에 스스로 고요해지는 수밖에. 2003년 3월 무렵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분노와 안타까움 등 세속의 마음도 서서히 흘러갔다. 자연도 눈으로 마음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리꽃도 피어 웃었고, 두충나무도 혼자 서서 굳건했고, 고라니도 흠칫 넘겨다보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자연은 그렇게 그에게서 살아났고 그도 자연에서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맑은 숨결을 길어 올려 끼얹어주고
       조릿대 참대 소리로 마음을 정결하게
       빗질해주는 이는 누구일까
       숲과 나무가 내 폐의 바깥인 걸 알았다.
       더러운 내 몸과 탄식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걸 보며
      
숲도 날 제 식구처럼 여기는 걸 알았다.”  -
도종환 시인의 ‘숲의 식구’ 중에서-

충북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에 위치한 황토집 ‘구구산방(龜龜山房, 거북이처럼 오래 사는 산방)’에서 시심을 가다듬는 시인 도종환(57) 씨의 얘기다. 구구산방은 숲을 배경으로 한 황토집으로, 그를 이곳으로 안내한 후배 동생이 암 치료와 요양을 위해 지은 집이었다.

                        산에서 내려다본 '구구산방', 이름 그대로 거북이를 닮았다.

세상도 삶도 달라지고

도 시인은 난로를 피워 방안의 온도를 데웠고 보이차를 내와 방문객들의 몸을 녹여주었다. 가끔 던지는 농담으로 마음속 부담감을 덜어주기도 했다. ‘신경실조’로 시름시름 하던 그는 후배 소개로 구구산방에 드나들면서 숲의 사계를 느끼고 자연과 생물의 진면목을 하나씩 깨달았다고 한다.
“황토집에 살아보니 아파트에서 잘 때와 달리 변(便)부터 달라져요. 색깔이 황금색이 되죠.(웃음) 자연의 흙과 햇빛, 바람, 물 등에 몸이 다르게 반응합니다. 마음의 속도도 늦춰지고요. 사막에서 살면 자기를 해치는 것이 나타날 것처럼 불안한데, 도시에 사는 건 마치 사막에 사는 것과 비슷하죠.”
물론 황토집에 산다는 것은 자연과 가까이 생활하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기도 했다. ‘함께’와 ‘공존’, ‘더불어’의 삶이 펼쳐진다.
“산비탈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술을 먹기가 쉽지 않죠. 그러면 근처 집에 들어가 ‘막걸리 있나요?’하고 물어본 뒤 막걸리를 얻어먹어요. 시골에 살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삶의 양식이 바뀝니다. 서로 ‘상추 없으면 우리 밭에서 따가라’고 말하죠.”
자연과 생명 속에서 세상과 사회, 삶을 바라보는 시각까지도 바뀌었다. 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달라졌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으며 결과적으로 세상도, 삶도 달라졌으니.
“예를 들면 4월 20일쯤 되면 나무에서 초록이 아니라 연둣빛 싹이 나죠. 그러면 ‘연두는 초록의 어린 새끼다’ 이런 생각을 만날 수 있거든요. 짐승은 어미를 만나면 좋아하니 ‘초록은 연두를 얼마나 예쁘게 생각할까?’라는 생각도 미치게 되죠. 사물이나 자연, 생명 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 달라지는 겁니다.”
이곳에 온 뒤 나온 <해인으로 가는 길>(2006),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2011) 등의 시집은 이전과 달리 불교적인 평화와 공존, 조화 등의 세계와 자연 친화적인 세계를 담고 있다.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것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도종환 시인의 '축복' 중에서- 

                                              

                검박한 시인의 거실에서 이루어진 자담큰 인터뷰. 거실 한면을 꽉 채운 책들.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

1954년 청주시 운천동 산직마을 오막살이집에서 1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도 시인은 증평군에서 살던 10여 년을 빼곤 아버지의 군납사업 실패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1년에 두 번 방학 때만 볼 수 있었던 그때, 그를 키운 건 8할이 가난과 외로움이었다. 

      “경기도 어딘가로 떠난 아버지는 소식 끊기고
       이름 지을 수 없는 까마득함들을
       뚝뚝 떼어 넣으며 수제비를 끓였다.
       어둠이 하늘 끝자락 길게 끌어
       허기처럼 몸을 덮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국물이 말갛게 우러나던 우리들의 기다림
       함지박 가득 반짝이는 어둠을 이고
       쓰러질 듯 문 들어설 어머니 마른 멸치 냄새가
       부엌 바닥 눅눅히 고이곤 하였다." - 도종환 시인의 '수제비' 중에서-  

                                                 
화가가 될 거라며 도화지가 부족하면 신문지에 그림을 그리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직접 그려 지인들에게 보냈던 그는 가난 때문에 등록금이 면제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에 들어갔다. 화가의 길이 멀어진 현실은 그에게 좌절을 안기고 술을 가깝게 했다.
“책가방에 소주병과 잔을 들고 다니며 마시기도 했어요. 점심 내내 술을 마시기도 했죠. 노래도 잘하지 못하면서 괜히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기도 했고요.”
1977년 사범대를 졸업한 뒤 3월 옥천군 청산고로 발령받지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와 가깝게 지내다가 시골 학교로 좌천된다. 1979년 5월 입대해 광주민주화운동 때 시 외곽의 진압부대원으로 투입됐지만 시민들을 쏠 수 없어 소총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고 5월을 견디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여수와 순천 사이 17번 국도에서 3중 바리케이드로 치고 호를 파 고갯길을 지키고 있었어요. 여수에 한국화약이 있어 시민군들이 무기를 가지러 내려올 것에 대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된 것이었죠.”
제대 후 그는 정기간행물이 폐간된 당시 대구와 청주 지역 문인들과 함께 <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활동했다. 동인지에 시 ‘고두미 마을에서’, ‘울타리꽃’, ‘진눈깨비’, ‘삼대’(연작시)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도 시인의 작업실, '구구산방'은 황토로 지은 집이다.

아내가 암에 걸리다

첫 아이를 낳고 이듬해 아내가 암에 걸렸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어느 날, 청원군 부용면 어디쯤에서 시골 길 담벼락에 줄지어 핀 하얀 접시꽃을 보고 창백해져가는 아내를 떠올렸다. 도서실에 올라가 울면서 아내에게 ‘접시꽃 당신’을 썼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중에서- 

                              
1985년 8월 아내는 4개월 된 딸과 3살 된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떴고, 그해 겨울 그는 동인지 <분단시대> 판화시집에 ‘접시꽃 당신’과 ‘병실에서’,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등을 실었다. 판화 시집이 문제가 돼 동이중학교로 좌천됐지만, 시인 김사인 씨가 시집을 내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 아닌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것을 내면 욕먹는다’며 반대했어요. 김씨는 ‘언제까지 아파만 하고 있을 것이냐, 한 번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아니냐’고 주장했죠.”
“결국, 다시 전화가 오면서 시집을 내게 된 거죠. 시집은 사랑과 죽음을 다뤘는데, 사랑과 죽음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 중의 하나죠. 직접 경험하고 울면서 쓰니까 독자들도 울어준 것 같고, 체험에서 우러난 진정성, 절실함이 있는 시라고 봤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집 <접시꽃 당신>은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구구산방의 거실에서 보이는 숲.


 

그리고 1991년 늦가을
1990년 겨울. 그는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아이들을 위해 엄마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뒤다. 첫 아내와 사별한 지 6년째가 되던 1991년 늦가을 재혼했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온갖 비판이 쏟아졌고 시집은 헌책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전화로 욕을 했고 강연이 끝나면 ‘어떻게 <접시꽃 당신>을 써놓고 다시 결혼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거나 질문한 사람도 있었죠. 지금도 만나면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아시죠?”라고 말하는 이도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혼자 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아이들을 혼자 키우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어요. 작가로서 좋은 이미지를 갖고 가면 돈이 될 수 있지만, 아이들을 엄마 없이 자라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부모에게 계속 부담을 지우는 게 잘한 일인가를 여러 번 생각했어요. 문학으로 정면 승부하지 않고 이미지로 유지해가는 것이 온당한 태도인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그는 1998년 10년 만에 덕산중학교로 돌아왔다. 대학교 교수로 임용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좋아 시골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는 10년 전의 학교가 아니었고 수업도 잘 먹혀들지 않았다. 이때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다. 휴직과 복직을 거듭하며 2003년부터 구구산방에 드나들다가 2004년 퇴직금 1,860만 원을 받고 은퇴했다.

                       습작중인 시(사진 좌). 인터뷰 도중 이웃에서 가져다 준 곶감(사진 중앙).
                                                차와 고구마를 먹으며 이어진 인터뷰.

인생의 시계는 다섯시를 향하여 
도 시인은 교직에서 퇴직한 뒤 구구산방으로 들어왔다. 산방 생활이 이어지면서 이제 아픔과 고통마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시의 심연으로 향하는 그는 지금 자신의 ‘인생 시계’가 오후 3시를 지나 5시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밤이 오기 전 찬란한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는 황홀한 시간이 한 번쯤은 오리라는 믿음을 갖는.
앞으로의 시 세계는 어떻게 펼쳐질까. 그는 “어떤 시 세계가 기다릴지 모르겠지만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한다. “한용운 선생의 ‘님의 침묵’이나 윤동주 씨의 ‘서시’ 같은 그런 작품 한 편 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이들이 기억하고 사랑해줄 만한 한 편을 써야겠죠.”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 도종환 시인의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중에서- 
 

가족들은 아직 구구산방을 100퍼센트 즐기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상추가 날 때나 시원한 여름에는 좋아하지만 춥고 장작 때는 게 익숙하지 않아 겨울에는 불편해하고 아이들은 텔레비전이 없어 불편해한다.
“산에 들어와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젊은 때에는 교육과 의료 문제 때문에 들어오기 쉽지 않고, 나이 들면 편의시설도 가까이 있어야 하죠. 무서울 수도 있고요. 모두 농촌으로 들어와 살라고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는 정신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눈이 쌓여 고적한 황토집의 겨울을 오히려 좋아한다. 하늘에서 내려와 나뭇가지 마다 세세하게 눈이 쌓인 밤, 황홀하게 나신을 펼쳐 보이는 보름달. 별은 하늘 가득 총총. 간이 화로에서 익혀진 고구마가 그와 우리 모두의 입속으로 들어와 입맛을 살려내고 있었다.


 

 
 글을 쓴 김용출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세계일보>에
 입사, 정치부, 사회부 등을 거쳐 현재 문화부에서 영화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쓴 책으로
  <독일아리랑>, <독서경영>(공저) 등이 있다.
 


출처 : 기타가 있는 마을
글쓴이 : 소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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