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색과 유하의 한반도 도보 여행기 ⑩ 동강 제장마을
시민의 힘으로 지켜낸 자연, 1990년대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성과
이 아름다움 사라지지 않길…칠족령 전망대에서 기원
날이 밝자 제장마을의 자태가 드러났다. 칠족령에서 내려온 숲이 끝나고, 그 부분에서 사과밭이 이어졌다. 그 양편으로 몇 채의 집들이 드문드문 세워져 있었고, 집들 주변에 밭들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편안한 인상이었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늘 욕하며 다니는 ‘삐까번쩍’한 펜션들이 그곳에마저 서 있었던 것이다. 곧 완공을 앞둔 동강사랑 옆의 신축 펜션은 외벽이 밝은 빛깔의 돌로 되어 있어 전체적인 균형을 깨트리고 있었다.
동강사랑의 크기는 생각보다 컸다. 1층 반 정도 높이 건물 한 채와 2층 높이의 집이 한 채, 총 두 채가 서 있었다. 둘 다 흙으로 지었다고 설명할 것도 없어 보였다. 광택이 없는 황톳빛, 땅에서나 볼 수 있는 그 색깔 그대로였다. 지붕은 나무 널빤지를 겹쳐놓은 너와지붕. 다른 목조건축물과는 달리 나무기둥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게 특징이었다.
김영주님의 동의를 구하고 집 안도 둘러보았다. 햇살은 넓은 창을 뚫고 깊숙히까지 들어왔다. “처마의 길이를 조정해서 겨울철, 여름철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을 조정해요.” 처음 지을 때 처마의 길이를 잘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너무 길면 겨울철에도 햇빛이 짧게 들어올 것이고, 너무 짧으면 여름에도 뜨거운 햇살의 공세를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영주님은 호기심에 가득찬 우리 눈빛을 읽은 것 같았다.
펠릿 보일러를 주용도로 쓰고 기름 보일러를 보조로 사용한다고 한다. 지붕을 너무 높게 지은 탓에 보온 효율은 떨어진다고. “그나마 따뜻할 수 있는 이유는 벽에 엄청 두껍기 때문이에요!” 그의 말에 벽에 가까이 가 한 쪽 눈을 감고선 두께를 가늠해 본다. “게다가 강도가 엄청 세요!” 이 말에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고 벽을 툭툭 쳐 보았다.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한데도 귀까지 갖다 댔다. “이 집에 놀러온 아이들도 늘 그런 반응이에요.” 하며 웃는다. ‘제길, 애 취급 받았다.’ 툭툭 치던 손을 애써 팔짱을 끼며 감추고, 고개를 휘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애 아니에요.’라는 표현이다.
▲동강 제장마을의 동강사랑(東江舍廊). 대한민국 스트로베일 하우스 1호이다. 압축 볏짚으로 벽을 세우고 그 안팎을 황토로 마무리한다. 자연재료로 만들었기 때문에 주변경관과 탁월하게 어우러진다.
그와의 첫 만남이 지역에너지학교여서 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지역에너지학교는 녹색연합 같은 환경단체를 비롯해 부안시민발전소, 에너지 자립마을인 통영 연대도 등 여러 조직이 모여 지역 에너지네트워크를 이루어 매년 워크숍 형태로 열리는 학교다. 마을 단위 또는 도시에서 어떻게 에너지를 효율화할 것인가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배우는 자리인 것이다.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집을 손수 짓는 꿈을 가진 우리이기에 그곳에 참여했고, 그런 의중을 알아차린 김영주님이 내셔널트러스트의 우리나라 제1호 스트로베일 집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선배 중의 선배였다.
몇 년 전 도법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결사’의 탁발순례를 함께 했다고 한다. 그 때 거의 빈 손으로 무작정 따라나섰다고 한다. “가진 것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라며 방긋방긋한 얼굴로 그 때를 떠올렸다. 수확이 끝난 밭에서 백배명상을 했다는 그의 추억은 나마저도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그 후에 농촌에 있는 지인에게로 가 일년이 넘게 농사를 지었던 것이나, 경북 영양에서 아이들 공부방을 열어 농사와 교육을 함께 했던 것이나, 그의 경험 하나하나가 우리 입을 벌려 놓았다. 무엇보다도 도시의 생활을 말끔히 끝낸 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생활하는 모습이 멋졌다. 비록 제장마을 근처에서 집을 구할 수가 없어 영월로 출퇴근한다는 그였지만 말이다.
동강사랑 주변으로는 5천평이 넘는 땅이 내셔널트러스트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시민들의 모금으로 이 땅을 구입해 ‘시민유산’으로 만들었다. 2000년 6월 5일 동강(영월)댐 건설이 백지화 된 뒤 엄청난 개발압력이 이 지역을 강타했고, 그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우리나라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90년대 중반 정부가 그린벨트를 해제하려던 때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자 설정했던 보호지역을 정부를 잡은 토건권력이 개발을 내세워 무력화시켰던 것이다.
4대강 사업 이곳저곳 답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의 답답함을 느꼈다. 보호해야만 하는 강을 국가 멋대로 망쳐버린 것이다. 강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호의 당위성 때문에 사유지를 국가에서 매입했다. 지금도 돌아다니다 보면 환경부나 산림청에서 산, 임야 등 사유지를 매입한다는 펼침막이 곳곳에 휘날리고 있다.
국가에서 보호하고 관리한다는 명목이다. 그런데 보호는커녕 막개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국가권력을 쥐게 된 비열한 토건세력들이 자연을 팔아 자기들의 배를 불리고자 한 것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말이다.
▲강변의 나무들, 겹겹이 펼쳐진 '뼝대'.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없는 이곳 동강만의 풍경이다. 이 경관을 지켜내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눈요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 풍경 속에는 이곳에 적응해 수천년, 수만년 동안 살아온 생명들이 빼곡하다.
더군다나 마땅히 보호되어야 하는 지역을 개발하면서 일말의 합의과정도 없었다. ‘무뇌아’ 취급을 받던 공무원들은 ‘밥줄’ 운운하며 토건세력을 옹호하며 파괴를 일삼았다. 신념이라고는 털끝 만큼도 없는 자들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상사에 대한 “충성!!”만 남은 듯했다.
서울에서 출근하던 때에도 이런 시민유산이 하나 있었다. 성북동의 ‘최순우 옛집’이었는데, ‘멋대가리 없는’ 네모 반듯한 빌라나 상가가 쓰나미 오듯 밀어닥칠 때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덕분에 살아남은 것이다. 많은 군중 속에서도 자신의 사랑은 언제나 빛나듯 그렇게 최순우 옛집은 반짝이고 있다.
시민유산으로 지정된 곳은, 땅의 소유 개념이 ‘인간’으로 한정되어 있는 법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국가권력도 토건세력도 이곳을 건드리지 못해야만 한다. 불행히 시민유산을 영구적으로 보호해 줄만한 ‘국민신탁법’이 완전하지 않아 조금은 불안한 상태라고 한다. 파괴를 녹색이라 일컫는 ‘싸이코패스’ 토건세력과 오직 밥줄에 “충성”하는 ‘무뇌’ 공무원 조직이 들이닥치는 상상은 하기도 싫었다.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 지금보다 더 활성화 되어서 인간의 주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땅은 모두 시민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솟구쳤다. 물론 이 마음은 나의 분노다. 케이티엑스보다도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개발 열차의 브레이크는 언제 잡더라도 늦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밭에 깔려있는 비닐멀칭을 떼 내고, 6개월이 지난 오가피 효소를 걸러내는 작업을 도왔다. 혼자서는 5000평이나 되는 땅을 가꾸기 힘들다고 했다. 그래도 그가 이미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고, “농사는 하고 싶은 일”이라 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자원봉사자들이 오긴 하지만 큰 도움이 안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곳에서의 경험 자체가 배움이 될 터이기에 소중한 행사라고 했다.
기회가 될 때면 지역 아이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도 한단다. 일종의 생태체험 활동이다. 땅에 대한 감성을 지키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는 그런 활동만큼 좋은 게 없을 것이다. 우리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체험활동을 한 셈이다.
▲보이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저절로 명상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여행을 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은 특별하다. 정말 특별하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는 우리들이 고마웠는지 그는 마을 이곳저곳을 소개시켜 주었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차를 즐겨마시는 분의 집이었다. 그 집은 칠족령에서 내려다 봤을 때 사과밭 오른쪽 아래에 있었다.
뼝대가 겹쳐지는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그 집은, 붉은 빛깔이 깜싸고 있었다. 지붕도 빨간색 기와에다 벽 자체도 붉은 빛이 우러난 황토로 되어 있었다. 나무 기둥은 옅은 노랑에 가까웠지만 온통 빨강이라 머릿속에서 분간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 한옥이었지만 다시 보니 유럽 지중해 산골의 오두막 같았다. 좌우 대칭이 아닌 지붕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현관에 독자적으로 튀어나와 있는 처마는 원래의 굴곡이 그대로 살아있는 나무가 떠받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한옥을 변형한 모양이었는데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오 사범’이라 소개한 집 주인은 차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은 거실에는 넓은 차탁이 반이나 차지하고 있었고, 벽 하나에는 찻잎으로 만든 거대한 ‘차’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다. 거실과 주방 사이에는 크고 작은 호박 모양의 찻잎 덩어리가 포개져있는 모형이 있었다.
유리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그것 역시 진짜 차였다. “손님들이 왔으니 한번 열어 볼게요”하며 오 사범님은 “차 향기가 나죠?”라며 우리의 반응을 구했다. 금세 집안이 온통 차 향으로 가득 찼다. 우린 질소에 갇힌 과자마냥 차향에 갇혀 버렸다.
차탁을 중심으로 돌아 앉았다. 물을 끓이고 찻잔과 주전자를 데웠다. 찻탁 구석의 작은 구멍으로 데우고 난 물들이 쪼로록 흘러내려갔다. “보이차는 보이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에요.”라며 그의 차 이야기가 시작됐다. 능숙하게 차를 따른 뒤 나무로 된 핀셋으로 잔을 쥐더니 각자 앞에 하나씩 놓았다. 유하는 오 사범님의 손놀림에, 차 향기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라도 흘러나올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난지, 여러가지 차들이 어찌나 맛나는지 화장실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차를 마시니까 허리가 곧아지고 저절로 명상이 되는 것 같아요!”라는 내 말에 오 사범님은 더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떠나기 전 “잠시만요! 선물을 내줄게요.”하더니 작은 휴대용 찻잔세트와 10년이 지났다고 하는 보이차 한 곽을 가지고 왔다. 우리가 그에게 준 건 챙겨갔던 초코파이 다섯개밖에 없었다. 두 손을 배에 가져가 허리를 굽히고 “고맙습니다!” 절하곤 그곳을 나왔다.
산책을 이어갔다. ‘집 앞 풍경’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깎아지른 절벽, 뼝대 앞에 서니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었다. 어찌보면 공포스러워야 할 자연의 거대함이 기울어가는 태양 덕분에 따듯하게 느껴졌다.
▲뼝대 아래 물이 모여 있는 하방소. 우린 이곳에서 아이가 되었다. 물 위로 튕겨나가는 돌을 바라보며 웃는다. 스트레스는 웃음과 함께 날아가 버린다.
▲동강 할미꽃. 동강에서 자라나는 할미꽃은 다른 지역 할미꽃과 달리 꽃봉오리를 꼿꼿하게 세운다. 이곳의 꽃을 다른 곳에 옮기면 고개를 숙인 꽃이 핀다고도 한다.
나는 뒤에서 사진을 찍느라 천천히 따라가고, 영주님과 유하는 앞서 가더니 물 앞에서 멈추어 ‘역시나’ 물수제비를 뜨기 시작했다. 둥글고 얍실한 돌은 통통거리며 공중으로 물방울을 띄워 올렸다. 역광에 비친 물방울들이 빛 잘 받은 다이아몬드 조각처럼 반짝였다. 그걸 사진기에 담겠다고 배를 자갈밭에 바짝 붙이고 찍어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사진을 관두고 수제비 뜨기에 합류했다. 공중부양하듯 나아가는 돌의 느낌이 꼭 발바닥에 전해는 것 같다.
돌아가는 자갈밭 사이사이에는 막 동강할미꽃 꽃봉우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할미꽃은 동강 유역에서만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 씨를 다른 곳에서 심으면 여느 할미꽃처럼 고개를 숙여 버려요.” 동강 할미꽃 생태조사 때 안내를 맡았던 이력 때문인지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따뜻해진 햇살, 터지지 않은 할미꽃의 솜털이 은은하게 빛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칠족령으로 향했다.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것보다 햇빛이 있을 때 훨씬 아름다울 것 같았다. 유하를 숙소에 버려두고 뛰기 시작했다. 빈 몸으로는 오르막도 뛰오르는 게 불가능하진 않았다. 거친 숨이 정수리를 뚫기 전 쯤 전망대에 닿았다.
물길이 여러 번 휘감아 돌아가는 모습이 더 확연히 보였다. 사진기를 꺼내 찍어보지만 광활한 풍경이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파노라마 사진을 만들 생각으로 세로로 나누고, 가로로 나누고 갖은 노력을 다해보지만 엘시디 창에 나타난 것은 밋밋한 그림밖에 없었다. 아쉬움에, 풍경을 더 느껴볼 요량에, 눈이 똥그레질 만큼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4대강 사업이 아니었다면 낙동강이나 금강에서도 아름다운 강이 남아 있었을 텐데. 더 많은 국민이 이 아름다움의 가치를 느끼고 함께 보존하면 좋을 텐데. 이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면서 눈을 감고 손을 모았다.
누군가가 ‘꼴값하네~’하며 쳐다볼까 무서워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양 손을 더 꽉 쥐었다. 주위로 향기로운 봄바람이 살랑거렸다.
▲칠족령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 시민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곳은 그저 넓은 호수가 되었을 것이다. 댐이 생긴다면 강이 죽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럼에도 이 땅 곳곳에서는 자연을 죽이려 안달이 난 사람들이 아직도 활개를 치고 있다.
글·사진 김성만(채색)/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생태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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