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멘토의 마음수업
먹고 살기 힘드네 어렵네 해도, 보릿고개도 못넘겨 배곯던 시대에 비할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거리엔 차가 넘치고 네온사인은 현란하다. 그런데도 화려한 외면과 달리 마음은 더욱 찌들고, 외롭고, 힘들다는 이들이 늘어만간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이 경제개발협력기구 가운데 최고 수준이란다. ‘마음’이 이 시대의 제1화두로 등장하는 이유다.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으면서도 괴로움을 주고, 죽고 싶게까지 만드는 이 마음을 어찌할 것인가. 이 고통스런 부름에 산중 도인이 <마음 수업>에서 응답하고 나왔다.
저자 이광정(76)은 원불교 최고지도자인 ‘종법사’에 올라 12년간 원불교단을 이끌고 스스로 은퇴해 익산 미륵산 구룡마을에 은거하고 있다. 원불교에서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정산 송규·대산 김대거 종법사의 맥을 이은 4번째 지도자였다.
그가 1994년 58살로 종법사에 오르자 또 한명의 종법사 후보였던 83살의 박장식 종사가 대중들 앞에서 오체투지로 절을 하며 그를 ‘법주’(진리의 수호자)로 받든 일화가 있다.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유망한 청년실업가였다가 원불교에 귀의해 원광대 전신인 유일학림 학장과 교정원장등을 지냈던 박 종사는 지난해 열반하면서 원불교에 4명 밖에 없던 ‘대각여래위’(최고 깨달음을 얻은 단계)로 추존됐다. 그에게조차 그토록 존중 받던 저자는 원불교인들에겐 본명 보다는 ‘좌산’이라는 호와 ‘교단 최고 어른’이란 의미의 ‘상사’로 더 익숙하다.
하지만 그의 매력은 그런 존칭이 아니라 역경을 순경으로 돌려놓은 삶에 있다. 그는 독신수도자로서 삶을 시작한 20대에 간이 크게 상해 완치 불능 판정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40대엔 당뇨병이 찾아왔다. 간경화는 잘 먹고 쉬어야 낫지만, 당뇨병은 조금만 먹고 운동을 많이 해야 낫는 병이었으니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어 꼼짝없이 죽을 상황이었다. 그는 마음공부와 좌선을 통해 이‘상극의 두병’을 극복해냈다. 그가 70대가 넘어서도 얼마나 건강하든지 등산을 할 때 온종일 날다시피하는 그를 따르지 못해 시자들이 울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익산 미륵산 정상에 오른 좌산 이광정 상사
그런 상극병을 몸에 지닌 채 생사를 넘나들면서도 수행이면 수행, 일이면 일 양면에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이 해낸 그 앞에선 누구도 ‘나는 이래서 힘들다’, ‘저래서 힘들다’는 핑계를 대기가 쉽지않다. 그는 ‘고난이야말로 마음을 업그레이드시켜 삶을 개선시킬 최고의 찬스’라고 말한다.
이런 모습 때문에 그는 신체보다 마음이 더 젊는 인물로 회자된다. 흰눈썹 휘날리는 할아버지면서도 어린 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경청하고 호기심을 보이며 무슨 일이든 구체적으로 상대의 눈높이에서 이야기 해준다는 것이다. 원불교도들 뿐 아니라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의 멘토 역할을 하는 것도 그가 알듯 모를듯한 선문답이나 흘리는 도인이나 산신령쯤으로 머물지 않고, 내 마음으로 다가와 구구절절하고 상세하게 길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그에게 개인적 괴로움이나 사업상 난관에 처했을 때 상담하러온 이들에게 그가 일러주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지 늘 듣는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다. 그는 삼성가의 ‘숨은 정신적 멘토’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남다른 지혜는 마음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의 원리를 터득해 지혜가 열린 사람은 될 일만 하고, 지혜롭지 못한 이는 실패할 일만 골라한다”는 자신의 말을 삶에서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0월 2일 원불교 미주총부 개원식 때 좌산 상사에게 예를 올리고 있는
김혜성씨와 딸 홍라희 리움관장, 아들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마음수업>은 마음의 원리와 수련의 원리, 수련의 실제, 마음공부의 단계 등 ‘마음공부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알지 않으면 안될 긴요하고 구체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는 시종일관 위로를 잃지않지만,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세가지 결단을 요구하기도 한다.
“난공능공(難空能空·비우기 어려운 것을 비움)하라. 누구나 하찮은 것은 잘 잊고 잘 털어버릴 수 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을 털어버릴 때 실력이 길러진다. 난지능지(難知能知·알기 어려운 것을 기어이 알아냄)하라. 아무리 어렵고 막막한 것이라도 기어이 알아내려고 화두로 삼을 때 능히 알게 되는 경지에 이른다. 난행능행(難行能行·해내기 어려운 것을 기어이 해냄)하라. 되는대로 사는 자세론 어림 없다. 타인이 한번에 도달하면 나는 백번 천번을 해서라도 도달한다는 정신이라면 기어코 고난을 돌파해 용이 여의주를 얻듯이 비상하는 때가 오리라.”휴 펴냄. 2만원.
글 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