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글·책 】

[스크랩] 어머니의 여한가

자운영 추억 2012. 1. 8. 18:20

 

       어머니의 여한가(餘恨歌)

 

쇠락하는 양반가의 맏딸로 태어나
반듯하고 조순하게 가풍을 익혔는데
일많은 종갓집 맏며느리 낙인찍혀
열여덟 어린나이 숙명 처럼 혼인하여
두 세살씩 터울 두고 일곱 남매 키우느라
세월 가는줄 모른 채 살았구나~

 

 

봄 여름에 누에치고 목화따서 길쌈하고
콩을 갈아 두부 쑤고 메주 띄워 장 담그고
땡감 따서 곶감치고 배추절여 김장하고
호박고지 무말랭이 넉넉하게 말려두고
어포 육포 유밀과 과일주에 조청까지
     정갈하게 갈무리해 다락높이 간직하네,

 

 

 

찹쌀쪄서 술 담그어 노릇하게 익어지면

용수박아 제일 먼저 제주 부터 봉해두고
시아버님 반주꺼리 맑은 술로 떠낸다음
청수붓고 휘휘저어 막걸리로 걸러내서
들일하는 일꾼네들 새참으로 내보내고
  나머지는 시루 걸고 소주내려 묻어두네~~
 

 

피난 나온 권속들이 스무명은 족한데

더부살이 종년처럼 부엌살림 도맡아서
보리쌀 절구질 해 연기로 삶아건져
밥짓고 국 끓여 두번 세번 차려내고
늦은 저녁 설거지를 더듬더듬 끝마치면
몸뚱이는 젖은 풀솜 천근처럼 무거웠네~~

 

동지섣달 긴긴밤에 물레돌려 실을뽑아

날줄을 갈라 늘여 베틀위에 걸어놓고
눈물 한숨 졸음 섞어 씨줄을 다져넣어
한치두치 늘어나서 무명 한필 말아지면
백설같이 희어지게 잿물내려 삶아내서
햇볕에 바래기를 열두번은 족히되리,

 

하품 한번 마음놓고 토해 보지 못한신세

졸고 있는 등잔불에 바늘귀를 겨우꿰어
무거운 눈 올려뜨고 한뜸 두뜸 꿰매다가
매정스런 바늘끝이 손톱밑을 파고들면
졸음일랑 혼비백산 간데없이 사라지고

  손끝에선 검붉은피 몽글몽글 솟아난다~~


 

내 자식들 헤진 옷은 대강해도 좋으련만

점잖으신 시아버님 의복 수발 어찌할꼬~

 탐탁잖은 솜씨라서 걱정부터 앞서고
공 들여서 마름질해 정성스레 꿰맸어도
안목 높고 까다로운 시어머니 눈에 안차
맵고 매운 시집살이 쓴맛까지 더했다네 


 

침침해진 눈을 들어 방안을 둘러보면

아랫목서 윗목까지 자식들이 하나가득
차내버린 이불깃을 다독다독 여며주고
막내녀석 세워 안아 놋쇠요강 들이대고
어르고 달래면서 어렵사리 쉬시키면
일할엄두 사라지고 한숨이 절로난다~~
 

 

학식높고 점잖으신 시아버님 사랑방에

사시사철 끊임없는 접빈객도 힘겨운데
사대봉사 제사는 여나무번 족히되고
정월 한식 단오 추석차례상도 만만찮네
식구들은 많다해도 거들사람 하나없고
여자라곤 상전같은 시어머니 뿐이로다 
 

 

고추 당추 맵다해도 시집살이 더매워라.

큰아들  장가들면 이고생을 면할건가 ?
무정스런 세월 가면 이신세가 나아질까 ?
이내몸이 죽어져야 이고생이 끝나려나 ?
그러고도 남는고생 저승까지 가려는가 ?
어찌하여 인생길이 이다지도 고단한가 
 

 

토끼같던 자식들은 귀여워할 새도없이

어느틈에 자랐는지 짝을 채워 살림나고
산비둘기 한쌍같이 영감하고 둘만남아
가려운데 긁어주며 오순도순 사는것이
지지리도 복이없는 내 소원인데
마음고생 팔자라서 그 마저도 쉽지 않네

 

안채 별채 육간 대청 휑하니 넓은집에
가뭄에 콩나듯이 찾아오는 손주녀석
어렸을적 애비모습 그린듯이 닮았는데
식성만은 입이 짧은 제어미를 탁했는지
곶감 대추 유과 정과 수정과도 마다하고
정 주어볼 틈도 없이 손님처럼 돌아가네
 

 

명절이나 큰일때 객지 사는 자식들이

어린것들 앞세우고 하나둘씩 모여들면
절간같던 집안에서 웃음꽃이 살아나고
하루이틀 묵었다가 제집으로 돌아갈땐
푸성귀에 마른나물 간장된장 양념까지
있는대로 퍼주어도 더 못주어 한이로다

 

손톱발톱 길새없이 자식들을 거둔것이

허리 굽고 늙어지면 효도 보려 한거드냐 ?
속절없는 내평생 영화보려 한거드냐 ?
꿈에라도 그런것은 상상조차 아니했고
고목나무 껍질같은 두손 모아 비는것이
내 신세는 접어 두고 자식걱정 때문일

 

 

회갑진갑 다 지나고 고희마저 눈앞이라

북망산에 묻힐채비 늦기전에 해두려고
때깔좋은 안동포를 넉넉하게 끊어다가
윤달 든해 손 없는날 대청위에 펼쳐놓고
도포 원삼 과두장매 상두꾼들 행전까지
두 늙은이 수의 일습 내 손으로 지었네

내가 먼저 죽고 나면 그 수발을 누가 들꼬
제발 덕분 비는것은 내가 오래 사는거라
무정한게 세월이라 어느틈에 칠순 팔순
눈 어둡고 귀 어두워 거동조차 불편하네
홍안이던 큰자식은 중늙은이 되어가고
까탈스런 영감은 자식조차 꺼리는데

 

 

내 살같은 자식들아 나죽거든 울지 마라

인생이란 허무한 것 이렇게 늙는 것을
낙이라곤 모르고서 한평생을 살았구나 
원도 한도 난 모른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
서산마루 해 지듯이 새벽 별빛 바래듯이
       잦아들 듯 스러지듯 흔적 없이 지고싶다~~~~~'
출처 : 면천중30회 알림방
글쓴이 : ^*^성명숙^*^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