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맛. 食 】

간간·졸깃·알큰·배릿 … 막걸리가 아른아른

자운영 추억 2014. 1. 19. 22:14

 

[온라인 중앙일보]입력 2014.01.19 02:04

정환정의 남녘 먹거리 <9> 벌교 겨울 꼬막

1 이제는 꼬막을 까는 도구도 만들어졌다


겨울이면 바다에서 나는 많은 것들의 맛이 진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수온이 낮아지고 그로 인해 살이 단단해지다 보니 그 안에 스며 있는 맛 역시 농축되기 때문이리라 짐작하는 것은 과학적(?) 설명. 찬바람을 맞으며 얼얼해진 사람들의 감각을 깨우기 위한 자연의 섭리라 생각하는 것은 감상적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쫄깃함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꼬막의 맛을 묘사할 때면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벌교를 처음 찾았던 것은 10여 년 전. ‘주먹 자랑하면 안 되는 곳’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던 터라 그리 다정하지 않은 곳이라는 선입관이 생긴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순천이나 보성에 비해 딱히 볼 게 없다는 게 그동안 발걸음이 뜸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벌교의 자랑이라 하는 꼬막 역시 대학 시절 자주 갔던 선술집에서 아무렇게나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기본 안주였기에 소중함을 느낄 일도 없었다.

“꼬막무침 할 줄 아는 처녀면 더 볼 것 없어”
찬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여행길에서 나는 잠시 몸을 녹일 요량으로 벌교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꼬막집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한 사람을 위한 상도 내놓고 있었는데(요즘은 기본이 2인상이라 혼자 여행 다니는 사람들은 별미를 맛보는 데 애를 먹게 마련이다), 나는 그곳에서 꼬막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그만 감탄을 하고 말았다. 그저 양념장을 위에 뿌려놓은 작은 조개가 그토록 다양한 곳에 응용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못하기도 했지만, 서울에서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쫄깃함에 놀랐던 것이다. 그에 대한 묘사는 작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사용된 것으로 갈음하는 편이 낫겠다.

“양념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대로도 꼬막은 훌륭한 반찬 노릇을 했다. 간간하고, 졸깃졸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그 맛은 술안주로도 제격이었다. 그래서 어느 잔칫집에나 삶은 꼬막이 큰 광주리에 그득하게 담겨 있게 마련이었다. 술상머리에 한 사발씩 퍼다 놓으면 제각기 필요한 만큼 까먹는 것이다. 콩나물이 그러하듯 꼬막도 잔칫집의 흔하고도 소중한 반찬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편법이었다. 제대로 꼬막 맛을 갖추려면 고추장을 주로 한 갖은 양념의 무침을 거쳐야 한다. 이 단계에서 꼬막 맛도 제각각이었다.

벌교 포구의 갯뻘이 끝이 없이 넓듯 벌교에서 꼬막은 흔해빠진 물건이었다. 그러나 감칠맛 나는 꼬막무침을 맛보기는 흔한 일만은 아니었다. 꼬막무침을 제대로 하는 처녀라면 다른 음식솜씨는 더 물을 게 없다는 말이 상식화된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고흥 쪽 해변에서도, 보성만 일대에서도 꼬막은 났다. 그러나 벌교 꼬막에는 그 맛이 미치지 못해 옛날부터 타지 사람들은 먼저 알고 차등을 매겼다.

벌교에서 물 인심 다음으로 후한 것이 꼬막 인심이었고, 벌교 오일장을 넘나드는 보따리장꾼들은 장터거리 차일 밑에서 한 됫박 막걸리에 꼬막 한 사발을 까는 것을 큰 낙으로 즐겼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태백산맥』이 발간되기 전까지만 해도 꼬막의 올바른 표기는 ‘고막’이었다는 것. 된소리 혐오증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 국립국어원이 그렇게 정해놓은 탓이었지만, 작가는 줄기차게 이를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꼬막이 표준어가 되었다. 만약 여전히 꼬막을 고막이라 부르고 있었다면 그 쫄깃하고 차진 맛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2 왼쪽부터 피꼬막, 참꼬막, 새꼬막들 3 아래쪽 참꼬막이 위쪽 새꼬막보다 뻘이 많이 묻어 있다 4 꼬막상차림
맛으로 따진다면 참꼬막·피꼬막·새꼬막 순서
이 맛있는 꼬막에도 종류가 있다. 크게 세 종류로 나뉘는데, 가장 비싼 것이 참꼬막이고 아기 주먹만 하게 큰 피꼬막(피조개로도 알려졌다)이 그 절반 정도의 가격, 가장 많이 잡히고 널리 먹고 있는 새꼬막이 피꼬막보다 10% 정도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 이렇게 종류별로 가격이 다른 것은 당연히 맛 때문이다.

“참꼬막이 질로 쫄깃하면서도 보드랍고 묵기가 좋응께. 게다가 참꼬막은 묵을맨치 클라믄 3년은 있어야 헝께 많이 잽히지도 않지. 새꼬막 같은 거야 뻘에다가 포자 뿌려두면 잘도 커서 금방 캐낼 수 있는디, 참꼬막은 지가 좋아하는 디가 아니면 크덜 않아. 그러니 귀한 거고.”

꼬막의 본고장 벌교시장에서 꼬막을 팔고 있던 아주머니는 꼬막에 대해 아주 간단하지만 명료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식당에서 정식이라 나오는 것들 중에 질로 첨 나오는 거, 막 삶아낸 꼬막 말고는 거진 새꼬막을 쓰고 있다”는 정보도 살짝 귀띔해주었다.

겉모습만으로도 세 종류의 꼬막은 금방 구분이 되는데, 껍데기에 골이 깊게 파여 뻘이 많이 묻어 있는 것이 참꼬막, 비교적 깨끗한 것이 새꼬막, 앞서 언급한 것처럼 크기가 큰 것이 피꼬막이다.

이 꼬막들을 취급하는 식당에서 내오는 메뉴는 거의 비슷하다. 시장 아주머니가 일러준 참꼬막이 가장 먼저 나오고, 그것을 까먹고 있다 보면 새꼬막으로 만든 꼬막무침과 된장국, 전 등이 나오는데 모두 꼬막이 들어간 것들이다. 음식이 모두 차려지면 하나씩 맛을 보는 것도 좋지만, 큰 그릇을 부탁해 밥 한 공기를 털어 넣고 꼬막무침을 던 후 쓱쓱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새콤달콤한 전라남도의 고추장 양념에 밥과 쫄깃한 꼬막이 한데 어우러져 입안에서 툭툭 터지는 듯한 식감을 만끽하다 목이 메어도 걱정할 것은 없다. 구수하고 짭조름한 된장국을 한 숟갈 떠 넣으면 스르르 녹듯이 넘어가니까.

그저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찬바람이 잦아들면 이 꼬막의 맛 역시 점점 옅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얼음장 같은 갯벌 속에서 마치 오래된 나무의 옹이처럼 짭짤한 감칠맛이 단단하게 박혀 있는 꼬막은 오직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바람 같은 손님이다. 행여 뒤늦게 붙잡으려 해도 뒤돌아보지 않는 매정한 겨울 나그네 같은 꼬막. 이 역시 감상적일 수밖에 없는 꼬막에 대한 감상이다.

『서울 부부의 남해 밥상』저자
정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