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크로키 화가 석창우]
작업현장서 감전 사고로 두 팔 잃어…
퇴원 1년만에 혼자 병맥주 따기 성공, '홀로일 때 뭐든 할 수 있다' 깨달아
IOC실사단 앞에서 김연아 크로키… 그 모습에 실사위원 뜨거운 눈물
현재 뉴욕서 '몸짓을 넘어' 전시 중
지금 미국 뉴욕 퀸스칼리지 고드윈 턴바흐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 캘리그래피전 '몸짓을 넘어(Gesture and Beyond)' 전시회에는 석창우의 작품 2점이 걸려 있다. 2.4m×1.4m, 1.8m×97㎝짜리 작품들인데, 모두 화선지에 일필휘지로 그려낸 역동적인 인체 크로키다. 크로키는 대상의 특징을 잡아 순식간에 그려내는 장르다. 한 작품은 군무를 추고 있는 군상을, 하나는 회전을 하고 있는 한 무용수의 연속동작을 그렸다. 얼마나 역동적이냐 하면, 손가락이나 손, 팔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만큼 역동적이다. 큼직한 붓에 먹 듬뿍 찍어 그리는 서예 크로키다. 화가가 말했다. "팔이 없어야 나올 수 있는 작품"이라고. 화가가 되기까지 긴 세월을 몇 자로 축약해본다.
- 김연아 선수가 트리플 러츠 하는 모습을 크로키한 작품.
석창우는 일거수일투족을 아내에게 기대 살았다. 퇴원하고 1년 반 정도 지났을까? 아내가 늦게 돌아온 날, 처음으로 혼자서 병맥주를 따서 마셨다. "벽을 따라 맥주병을 구석까지 밀고 간 뒤에 한 시간 반 만에 갈고리로 딴 다음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게 그렇게 시원했다." 석창우는 "남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하지만, 혼자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네 살이 된 아들 종인이 설거지하는 엄마한테 "새 그림 하나 그려줘" 하고 졸라댔다. "바쁘니까 아빠한테 해달라고 해"하고 정신없이 대답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나도 바쁘지 않던 아빠가 갈고리에 연필을 끼워 새 그림을 완성해놓지 않았겠는가. 1988년 2월 1일 아침이었다. 석창우가 말했다. "어찌 보면 예정돼 있던 일인 거 같다. 이전 삶도 행복했지만, 지금도 정말 행복하니까. 팔이 있었다면 내가 화가가 되었을까? 글쎄…."
이러구러 경로를 거쳐서 석창우가 정착한 장르는 서예 크로키다. 그가 말했다. "인체에 삼라만상이 다 있다. 그걸 서예라는 일필휘지의 기법으로 그린다. 팔이 없으니 온몸으로 그려야 하고, 그러다 보니 작품에서 힘이 느껴지는 거 같다."
- 진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몸에 흔적을 남긴다. 석창우는 그 흔적을 붓을 쥔 의수에 남겼다. 그는 화가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다닌 미술학원, 그리고 "어차피 포기하겠지" 하며 제자로 받아준 원광대 미대 교수 여태명의 작업실, 모두 아내 손을 잡고 다녔다. 남편은 "이 여장부 덕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고 했다.
그를 화가로 만든 또 다른 사람은 여태명이다. 서예를 가르치고, 글자를 통한 조형미를 가르쳤다. 결국 동갑내기 친구가 됐다. 스승이자 친구가 말했다. "필선에 대한 표현력이 뛰어나다. 조형 감각도. 한마디로 작품성이 뛰어난 화가다." 조언도 했다. "이제는 먹에 머물지 말고 색(色)으로 확장하시라." 서울 인사동에 있는 명인당필방 대표 김명은 "인품과 작품을 존경해서" 수시로 갈아치우는 화가의 붓과 재료를 협찬한다. 아내에게 기대 살던 남편은 어느덧 작품 판매로 "재료비 건지고 집에 돈 가져오는" 화가가 되었다. '장애 극복' '달인' 같은 진기한 인생살이에 눈 동그랗게 뜨던 사람들이 이제는 석창우의 작품 세계에 더 환호를 보내게 되었다.
장애와 직업이 묘하게 융합된 이 화가는 지금까지 국내외 개인전 36회와 200회가 넘는 단체전을 가졌다. 작품 한 점은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렸고 프랑스 파리의 한 화랑은 그의 작품을 상설 전시 중이다. 2011년 2월 평창 올림픽 실사단 앞에서 시연한 김연아 트리플 러츠 크로키 퍼포먼스 작품은 지금 IOC에 걸려 있다. 시연 당시 한 장애인 실사위원은 휠체어에 앉아서 울었다. 런던 올림픽 때 코리아하우스에서 시연을 보던 한 이탈리아 여성도 "마스카라 다 범벅될 때까지" 울었다. 큰 붓 하나 쥐고 있는 화가 사진에 얽힌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