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보석으로 산다
1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 작자 미상, 1613,
중앙에 2.78캐럿 샴페인 컬러 다이아몬드 장식이 박힌 다이아몬드 펜던트 브로치, 1900, 프랑스 추정.
2 <예카테리나 4세>, 요한 밥티스트 람피, 1793.
3 <메리 1세의 초상>, 한스 이워드, 1554
4 옐로우 골드에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사용한 송이 진주 브로치 펜던트, 영국.
Diamond
‘보석의 왕’이자 ‘보석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는 대표적인 결혼 예물이다.
결코 정복할 수 없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아마다스Amadas’에서 유래한 명칭에도 드러나듯
다이아몬드 원석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물질로 영원함 그 자체.
이런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다이아몬드를 사랑의 증표로 건네게 되었는지 모른다.
말하자면 불멸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유럽의 왕실들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고
그러다 보니 자기들의 권력을 과시하려는 노력과 과장이 심했다.
더불어 여인들도 다른 왕실의 여인보다 더 예쁘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이 극에 달했다.
위엄과 권위를 살리면서 아름답게 보이는데 보석만한 것이 있으랴.
그 대표적인 것이 다이아몬드였음은 물론이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공주도 정략결혼을 하면서 다이아몬드와 진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은빛 옷을 입은 그녀의 초상화를 보면
드레스 앞섶을 따라 조르륵 달려 있는 진주 장식을 비롯해 목걸이, 귀고리 그리고 머리를 장식한 진주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는 어디에 있을까?
가슴 중앙, 원반처럼 큰 검은색 목걸이가 바로 그것.
다이아몬드의 화려한 광채는 연마된 비율과 마무리 상태,
즉 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데 1613년 당시에는 커팅 기술이 미흡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이아몬드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내는 가장 이상적인 컷으로 꼽히는 브릴리언트 커트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선을 보였다.
이후 다이아몬드의 광채를 더욱 살리기 위해 뒷면에 박을 댔고,
더 크게 보이고 투명함을 강조하기 위해 금보다는 은에 세팅하는 경우가 많았다.
커팅 기술과 세팅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이아몬드의 진가가 영롱하게 빛을 발하자 왕실 여성들은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러시아가 대국으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시대에 러시아를 다스린 독일 출신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
많은 예술품을 수집했던 그녀는 보석 또한 좋아해 재임 중 왕실 소유 보석이 많이 늘었다.
그녀의 대관식을 위해 제작한 왕관은 유럽 역사상 가장 비싼 것으로 4936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다.
수많은 보석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왕관 맨 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
무려 54.12캐럿으로 120개의 면으로 연마된 것이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는 왕실의 주요 보석 중 하나인 이 다이아몬드를 자신의 애인인 포템킨에게 선물했다.
그는 예카테리나를 황제로 만든 쿠데타의 주요 공신일 뿐만 아니라
크리미아 반도까지 정복해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다이아몬드는 그의 이름을 따서 ‘포템킨 다이아몬드’라고 불렀다.
그의 사후에는 여러 사람을 거치다가 1853년 역사에 남을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스페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유제니 황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나폴레옹의 조카인 제2 제정의 황제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결혼했는데,
예카테리나 대제가 포템킨에게 주었던 포템킨 다이아몬드를 결혼 선물로 받았다.
다이아몬드는 목걸이의 중심석으로 세팅되었으며 그때부터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유제니 다이아몬드’로 불렸다.
그러나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제2 제정은 무너졌고 1875년 유제니 다이아몬드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중에 인도 뭄바이의 한 여성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1998년 11월 파리에서 열린 ‘차르의 보물들’ 전시에서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도 했다.
2 <뷔르템베르크의 올가 왕비>, 프란츠 빈터할터, 1865.
Pearl
역사적으로 유명한 진주로는 ‘방랑자’라는 뜻의 라 페레그리나가 있다.
무게가 무려 203.84그레인 (진주의 무게는 그레인으로 표시하는데 4그레인은 1캐럿과 같다).
스페인 펠리페 2세가 영국 메리 1세와 약혼하면서 이 진주를 선물로 주었는데, <메리 1세의 초상>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가 가슴에 착용한 브로치에 펠리페 2세에게 받은 귀하고 아름다운 배 모양의 진주, 라 페레그리나가 달려 있다.
메리 1세가 사망한 후 진주는 스페인으로 돌아갔고
250년 이상 스페인 왕실 보석으로 여러 왕비들이 즐겨 착용해 왕족들의 초상화에 많이 등장한다.
이후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해 그의 동생인 조지프 나폴레옹이 스페인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조지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떠날 때 이 진주를 가지고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방랑자’라는 뜻의 라 페레그리나라는 이름이 붙은 것.
조지프는 진주를 그의 사촌이자 후에 나폴레옹 3세가 되는 찰스 루이 나폴레옹 왕자에게 넘겼지만
왕정이 무너지면서 영국에 망명해 있던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진주를 팔았고 20세기 초까지 어느 공작 가문이 소유했다고 한다.
라 페레그리나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1969년 미국 영화배우 리처드 버튼이 이 진주를 구입한 후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생일 선물로 준 일 때문이었다.
그녀는 선물로 받은 진주의 세팅을 까르티에 사에 의뢰했고,
까르티에 사는 <메리 1세의 초상>의 브로치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했다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진주의 소비는 극에 달했다.
목걸이, 귀고리, 팔찌, 반지를 넘어서서 드레스 전체를 진주로 장식하기까지 이르렀다.
르네상스 시대를 선도했던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1세와 결혼한 스페인의 귀족 엘레아노라 데 톨레도의 초상화를 보면
그들의 진주 사랑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아들 지오반니와 엘레아노라>에서 목과 머리 부분의 그물망처럼 생긴 장식의 교차점마다 진주가 붙어 있고,
짧은 진주 목걸이에는 끝에 눈물 모양의 진주가 매달린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달려 있고,
긴 진주 목걸이는 굵은 진주알을 엮어 만들어 압도적이다.
이외에 허리의 보석 장신구 끝에는 작은 진주로 만든 장식 술이 달려 있는 등 다양한 크기의 진주로 온몸을 치장했다.
그림 속 그녀는 진주 목걸이를 비롯해 허리까지 내려오는 드레스를 장식한 진주들과 진주 티아라 등으로 한껏 화려하게 꾸몄다.
또 올가 왕비의 올케이자 니콜라이 1세의 며느리인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의 초상화에서
그녀 역시 머리 장식부터 목걸이와 브로치 그리고 팔에 두른 진주 목걸이의 장식 술 장식까지 그야말로 온몸을 진주로 감싼 모습이다.
3 플래티넘에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반지, 1910, 영국.
4 사파이어, 에메랄드,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깃털 브로치, 1860,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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