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레져 】

어제와 다른 해를 보러가다

자운영 추억 2013. 12. 26. 22:22

어제와 다른 해를 보러가다

  • 인천·강릉=정상혁 기자
  • 입력 : 2013.12.26 09:20

    인류 최초의 시계는 해시계였다. 예부터 해의 반복은 삶을 은유하는 가장 정직한 운동. 매일 뜨는 해(日)를 보내고 맞이하면서 벌써 한 해(年)의 끝에 섰다. 마지막과 처음의 해를 미리 보기 위해 서쪽에서 동쪽으로 303㎞를 달렸다. 뱀(癸巳年·계사년·2013년)이든 말(甲午年·갑오년·2014년)이든 해는 붉고 뜨겁다.

    지는 해

    22일 오후 1시 30분, 일몰(日沒)을 낚기 위해 서울 광화문을 떠났다. 행선지는 인천 서구에 있는 '정서진(正西津)'. 임금이 살던 경복궁에서 정서쪽으로 말을 달리면 나오는 나루라는 뜻을 지녔다. 2011년 인천시가 서구 오류동 일대에 이름 붙인 해넘이 관광 명소다. 말 대신 승용차를 몰아 양화대교를 건너 1시간여 달리니, 영종대교에 못 미쳐 정서진이 있다. 관광객들이 찬 바람을 피해 아라타워 23층에 있는 전망대로 몰려간다. 사방이 통유리로 탁 트인 이곳에서 물끄러미 서해를 굽어본다. 정도와 신도, 다대물도와 무명도… 둥근 섬들이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김포에서부터 흘러온 물은 강어귀에 이르러 조용하다. 이 물의 이름은 기수(汽水), 강물과 바닷물이 섞인 하구의 마지막 물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육지의 끝물이 헤엄치듯 비늘을 세운다.

    정서진은 광화문 도로 원표 좌표점인 위도 37도 34분 08초의 정서쪽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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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이 발길을 멈춘 서해 배수문 옆엔 2011년 퇴역한 1000t급 해경 '1002함'이 떠있다. 속을 비운 배는 기꺼이 공원이 돼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함상에서 서해의 완만한 둔부를 바라본다. 온갖 것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그 위에 햇살이 떨어진다. 정호승 시인은 시(詩) '정서진'을 쓰며 "해가 지는 것은 해가 뜨는 것"이라고 읊었다. 낙엽이 떨어지고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오듯, 해가 지지 않으면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달관이다.

    정서진 입구엔 '노을 종(鐘)'이라 불리는 구조물이 서있다. 가운데가 종 모양으로 파인 가로 21m, 세로 13m의 조약돌 모양 철제 구조물이다. 해가 지면 노을 종 중앙에 매달린 추가 좌우로 흔들리며 설치된 스피커에서 24번 타종하는 소리가 난다. 24시간의 새 시작을 상징하는 소리다.

     

    22일 정서진(正西津)의 일몰(日沒). 인천 영종도 주변 섬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과
    서해 갯벌이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이날 일몰 예정 시각은 오후 5시 7분. 짙은 구름 뒤로 이날의 마지막 해가 진다. 잔광(殘光)이 잔설 위에 내려앉는다. 타종이 끝나자 노을 종 주변의 스피커에서, 일제히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온다.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노을이 눈꺼풀처럼 다 내려앉자, 사위가 캄캄해진다. 해의 끝을 눈으로 쫓던 사람들이 두 손을 모은다. 이윽고 일제히 차로의 가로등이 켜졌다. 떠날 시간이었다.

    뜨는 해

    정동진역은 석탄 소송이 주 업무였던 시골의 조그마한 역이었지만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가 방영되면서 연간 수백만명이 다녀가는
    최고의 해돋이 명승지가 되었다.

    오후 5시 30분, 이번엔 일출(日出)을 보기 위해 강원도 강릉 정동진(正東津)으로 향한다. 광화문을 기점으로 정동쪽에 있는 나루다. 차로 4시간여를 달리자, 7번 국도에 들어선다. 달이 뚜렷해지자 철책 너머의 파도가 발광을 한다. 오후 10시, 정동진역에 이르러 차를 세운다. 맞은편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인다. 파도를 마시는 기분이다. 기적 소리가 울릴 때마다 역(驛)을 빠져나오는 이들의 면면이 비슷한 소망으로 반짝인다.

    일출 예정 시각을 1시간여 앞둔 23일 오전 6시 30분, 정동진역 뒤편에 있는 해변에 5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등 뒤엔 여전히 상현달이 시퍼렇고, 아직 해는 수평선 아래에 있다. 7시 37분, 일출 예정 시각이 넘어서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기꺼이 압도당할 채비가 된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딱 벌린 건 10분 뒤. 썬크루즈리조트 왼쪽으로, 감은 눈을 뜨듯 구름과 구름 사이로 해가 둥글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한결같이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자신의 이름을 모래에 새긴다. 오전 8시, 아침밥을 먹으러 떠나는 행렬 뒤편으로 설렁탕 맑은 국물에 깍두기 하나를 풀듯, 조금씩 햇무리가 번진다.

    일출을 보고 난 뒤 '시간 박물관'에 들른다. 열차 7량을 연결해 지난 7월 정동진 해변에 개관한 이 박물관은 타이태닉호에서 발견된 회중시계를 비롯, 해시계·물시계·원자시계 등 150여 점의 각종 시계를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마지막 칸에 닿으면, 박물관이 시계가 아닌 시간을 전면에 내세운 이유를 알 수 있다. 둥근 창문 밖으로 보이는 파도와 해 때문이다. 박물관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놓인 '정동진 해시계'에 이런 말이 새겨져 있었다. 'time and tide'. 시간과 파도가 만나면 세월이 된다. 그 위로 위무하듯 해가 뜬다.

     

     

    한 해가 저문다. 먼지를 털듯 마지막 해(日)를 보내고, 깨끗한 마음으로 새 해를 맞는 일은 매일 밥을 먹듯 평범하면서도 성스러운 일. 올해는 어디서 지는 해를 보내고, 떠오르는 해를 반길까. 전국 유명 해넘이·해맞이 명소 10곳을 골랐다.

    해넘이

    왜목마을(충남 당진)

    지형이 왜가리 목을 닮아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사람들이 동네 뒷산으로 부르는 고도 79m 완만한 석문산에 올라 대난지도와 소난지도 사이에 놓인 비경도를 중심으로 이지러지는 낙조(落照)를 볼 수 있다. 일몰 감상 포인트로 유명한 '석문각'에서 풍도와 육도가 석양 뒤로 저무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당진시청 관광개발사업소 (041)350-6522

    장화리(인천 강화도)

    늦은 오후, 마니산 서쪽 해안가에 자리 잡은 장화리 낙조마을에 가면 드넓은 강화도 갯벌과 그 위에 나체로 드러눕는 노을을 만날 수 있다. 마을 앞에 자리한 작은 섬 '소렴' 위에 석양이 비스듬히 걸릴 때 풍경이 일품. 낙조마을에서 5㎞ 정도 떨어진 적석사와 절 뒤편에 있는 낙조대의 잔광(殘光)도 은은하다. 해안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장화리 방죽 길도 유명 낙조 포인트. 강화군청 관광개발사업소 (032)930-4339

    땅끝마을(전남 해남)

    대한민국 육지 최남단 해남 땅끝마을의 일몰./해남군청 제공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서 바라보는 올해의 마지막 해, 그 문맥적 의미만으로도 큰 상징을 던져준다. 입장료 1000원만 내면 '땅끝 전망대'에 올라 남해를 배경으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해의 최후를 바라볼 수 있다.

    땅거미 속으로 잠겨드는 보길도·추자도·노화도 등 숱한 섬들의 이름을 불러볼 수도 있다. '땅끝 전망대'에서 1000여 개의 계단을 밟아 내려오면 '땅끝 탑'에 도착한다. 뜨거운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남군청 문화관광과 (061)530-5229

    부석사(경북 영주)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손꼽히는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을 비롯해 석등, 조사당 등 수많은 국보를 볼 수 있는 값진 여행지다. 안양루에서 절 아래를 내려다볼 때 발아래 펼쳐지는 산사 전경은 심신을 깨끗이 청소한다. 책 제목처럼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수많은 산봉우리를 스치고 내려오는 노을이 범종 소리에 스며드는 순간을 만끽해보자. (054)633-3464

    순천만 갈대밭(전남 순천만)

    전남 순천만 갈대밭의 일몰 장면.

    물억새와 쑥부쟁이를 따라 칠면초 군락이 바닷바람을 맞아 군무를 추고, 갈대는 본연의 색을 잊고 기꺼이 붉어진다. 사람 키보다 훨씬 웃자라 빈틈없이 밀생(密生)하는 갈대밭이다.

    해룡면 용산(龍山)에 오르면 전망대가 하나 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는 물줄기, 갈대와 함께 해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일은 한 해의 마지막 일정으로 모자람이 없다. 순천시청 관광진흥과 (061)749-4777

     

    해돋이

    호미곶(경북 포항)

    경북 포항 호미곶의 일출 장면.

    이곳의 일출을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출, 조선의 뜻을 새롭게 하는 일출'이라 극찬했다.

    호미곶에서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상생의 손'. 청동으로 만들어진 사람 손 모양의 조각상은 바다와 뭍에 각각 하나씩 마주 보며 배치돼 상생과 화합을 상징한다. 바다에 솟은 이 청동 손바닥 위로 둥근 해가 떠오를 때, 그 역동성은 한 해의 두근거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포항시청 관광진흥과 (054)270-5855

    유달산(전남 목포)

    30~40분 정도 걸어 유달산 정상에 오르면 목포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에 올라서서 서남쪽에 펼쳐지는 등푸른 바다와, 동북쪽에 옹기종기 모인 민가(民家)를 번갈아 굽어볼 수 있다. 다도해와 항구, 도시 외곽에 공평하게 내려앉는 햇빛을 바라보다 산중턱에 있는 유달사·수도사·관음사 등의 사찰에 들러 갈피 없이 들뜬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도 있다. 목포시청 관광과 (061)270-8432

    추암(강원도 동해)

    강원 동해 추암의 일출 장면. / 동해시청 제공

    시퍼런 바닷물과 기암괴석, 고색창연한 해암정(海岩亭)이 절묘한 조화를 이뤄 예부터 '삼척 해금강'으로 불린 추암.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가 미인의 아름다운 걸음걸이 같다 해 능파대(凌波臺)라고도 불린다. 바다에 일부러 꽂아둔 듯 날카롭게 솟아 있는 칼바위·촛대바위에 햇덩이가 걸릴 때 풍광은 그야말로 압권.

    추암 일출은 동산에 올라 직접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남쪽 백사장 끝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는 맛도 그만이다. 동해시청 관광진흥과 (033)530-2232

    선유도 공원(서울 당산동)

    서울 선유도 구름다리의 일출

    한강에서도 낭만적 해돋이를 감상할 수 있다.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아 노약자·장애인도 불편 없이 들를 수 있다. 공원에 있는 다리 '선유교'에 서면 양화대교 너머 LG 쌍둥이 빌딩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장관을 볼 수 있다. '선유정(仙遊亭)'에 앉아 섬 주변으로 날아드는 겨울 철새들과 떠오르는 해를 함께 볼 수도 있다. 선유도공원 관리사무소 (02)2634-7250

    통일전망대(강원 고성)

    우리나라 최동북단 일출 명소. 금강산의 구선봉과 해금강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옥녀봉·채하봉·일출봉까지 눈 안에 들어온다. 통일전망대 일출 행사는 1월 1일 오전 6시 30분 범종 타종으로 시작해, 인근 화진포해수욕장에서 대대적인 축제로 이어진다. 북녘을 바라보며 통일을 염원하는 곳이다. 고성군청 관광문화과 (033)680-3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