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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들녘, 초록 융단이 펼쳐졌다… ‘남도 1번지’ 전남 강진의 봄마중

자운영 추억 2012. 3. 4. 09:06

 
  • 2012.02.29 18:27  

  • 남도의 봄을 대표하는 원색은 초록색이다. 붉은 황토 속에서 싹을 틔운 청보리도 초록색이고 한겨울을 꿋꿋하게 버틴 녹차잎과 동백잎, 그리고 갯벌을 초록융단처럼 뒤덮은 파래도 모두 초록색이다. 그 중에서도 초록색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고장은 ‘남도답사 1번지’로 유명한 전남의 강진. 강진으로 가는 길은 동서남북이 사방으로 열려 있어 어디서나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강진의 풍광과 역사를 제대로 읽으려면 광주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와 영암을 거쳐 월출산의 누릿재(黃峙)와 풀치(草峙)를 넘어야 한다.

    ‘호남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출산 동쪽 자락을 넘는 그 길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로 가면서 눈물을 뿌리던 곳으로 강진, 해남, 장흥, 완도 사람들이 광주와 서울로 가기 위해 넘어야 했던 험난한 고갯길이기도 하다.

    ‘누리령의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정약용은 살을 에는 동짓달 삭풍을 맞으며 누릿재를 넘을 때의 소회를 ‘탐진촌요(耽津村謠)’라는 시에서 애절하게 노래했다. 당시 다산의 나이는 막 불혹으로 접어든 40세. 18년에 이르는 강진 유배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에 다산은 하필이면 월남리로 고개를 돌려 월출산을 접했다.

    누릿재를 넘어 강진 땅에서 처음 만나는 마을은 월출산 기슭에 위치한 성전면의 월남리. 우뚝우뚝 솟은 월출산 바위봉우리를 배경으로 강진다원의 녹차 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초록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녹차 밭은 27만평. 사철 푸른 녹차 밭이 등고선을 그리며 월출산을 오르는 모습이 장관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남도의 봄은 영랑생가 뒤란의 대숲에서 시어가 돼 바람에 나부낀다. 영랑 김윤식(1903∼1950)은 구수한 남도 사투리를 음악성 있는 시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지녔던 시인.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의 소재가 됐던 아름드리 동백나무의 초록색 잎과 선홍색 꽃이 물감을 섞어 휘젓듯 아찔한 꽃멀미를 불러일으킨다.

    영랑생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다 만나는 구강포의 남포마을에는 드넓은 갈대밭이 펼쳐져 있다. 구강포(九江浦)는 탐진강을 비롯한 아홉 골 물길이 모여 만든 포구. 물 빠진 갈대밭 수로엔 빨갛게 녹슨 고깃배들이 밀물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하고, 보리밭에서 날아오른 재두루미와 구강포에서 비상한 큰고니는 수시로 청잣빛 하늘에서 아름다운 비행을 자랑한다.

    다산이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등 600여권의 책을 저술한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만덕산 허리를 가로지르는 약 800m 길이의 오솔길이 빨랫줄처럼 걸려 있다. 다산과 백련사 혜장선사가 서로 오가며 학문과 사상을 논하던 오솔길은 야생 차나무의 초록색 찻잎이 토해내는 향기가 그윽하다.

    만덕산 중턱에 위치한 백련사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이 바다처럼 펼쳐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백나무 숲(5.2㏊)으로 수령 500∼800년생 동백나무 고목 8000여 그루가 선홍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강진 봄나들이는 대부분 다산의 유배길을 따라 백련사에서 막을 내린다. 그러나 강진에는 가장 강진다운 봄나들이 코스가 숨겨져 있다. 다산초당 옆의 천일각에서 보이는 강진만 건너편의 대구면과 마량면이 그곳이다. 곳곳에 청자 도요지 180여 곳이 산재한 청자마을이다.

    대구면 저두리 중저마을에서 마량포구에 이르는 약 10㎞의 해변도로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고려청자의 빛깔을 닮은 비취색 바다와 물 빠진 갯벌을 수놓은 파래 밭이 초록융단처럼 펼쳐진다.

    저두리 하저마을은 강진 바지락의 주산지로, 도로변 정자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바다풍경은 한 폭의 그림. 바다 한가운데에 출렁다리로 연결된 가우도가 떠 있고, 바다 건너편에는 만덕산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석문산, 주작산, 덕룡산, 달마산을 거쳐 다도해로 이어진다.

    강진만이 서서히 폭을 넓히다 바다처럼 시야가 확 트이는 곳에 이르면 강진 최남단인 마량면이다. 마량은 예로부터 강진, 장흥, 해남, 영암으로 들어가는 서남해안의 관문. 땅의 생김새가 말을 닮은 마량은 실제로 임진왜란 때는 제주의 말을 키워 한양으로 보내던 마목장이 위치한 곳이다. 그 옛날 말들이 뛰어놀던 바닷가 구릉에는 한 뼘 길이로 자란 초록색 청보리가 남도의 봄을 상징한다.

    유홍준씨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시뻘건 황토에 일렁이는 초록색 보리밭과 강진의 푸른 하늘빛, 그리고 선홍색 동백꽃잎을 ‘남도의 봄빛’이자 ‘남도의 원색’이라고 말했다. 그 원색을 변주해 흑갈색 황토와 연분홍 진달래, 누런 바다갈대밭을 그려낸 화가도 남도의 봄 이외엔 아무도 없다고 했다.

    겨우내 차가운 바닷바람에 맞서 혹은 땅속에서 혹은 숲속에서 원색의 꿈을 키워온 곳.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원색이 눈부신 그곳은 ‘봄이 오는 남도의 길목’ 강진이다.

    강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