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전통】

기억을 만지고 추억을 사고… 그 시절 그 느낌 팍!

자운영 추억 2013. 10. 12. 14:33

[View] 6090 물건에 열광하는 21세기 풍경
70년대 교과서·90년대 핑클CD… 곳곳서 과거 속 물건 전시·판매
아이팟도 이미 유리상자 속에
"아주 오랜 옛날 골동품보다 실제 자기 삶 서려 있어 더 감흥"
입력시간 : 2013.10.11 21:3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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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묘앞 풍물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중고 물건들. 9개월 사용한 도루코 면도기가 5,000원에 나왔다
"엄마 이게 뭐야?" "무선 전화기야." "엄마가 오~래 전에 쓰던 거야?" "별로 오래되지도 않았어."

10일 서울역사박물관 내 기증 유물 전시실은 아이들에게 끌려 다니는 부모들로 붐볐다. '최달용∙이영범-도시의 기억' 특별전에 나온 1960~90년대 생활용품에, 그 시절의 주인공들뿐 아니라 여섯 살배기들의 마음까지 들떴다.

62년에 제작된 금성사 T-703라디오부터 2009년 아이팟 터치 3세대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한 켠에는 쌀집에서 쓰던 배달용 자전거와 럭키 하이타이, 컴퓨터 잡지 'PC월드'의 90년 12월 창간호가 전시돼 있다. PC월드 특집기사 제목은 '크리스마스 카드를 디스켓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스쳐갔던 물건을 볼 수 있는 곳은 박물관뿐이 아니다. 경기도 용인의 '6080 추억상회'에서는 그때 그 시절의 물건들을 판다. 96년 아카데미과학사가 만든 조립로봇 칸담, 삼립빵을 담던 나무 상자, 구멍가게마다 있던 롯데껌 통이 매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다.

경매도 있다. 국내 최초 문화예술 경매회사 코베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근현대사 물건을 경매한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 지도부터 79년 국민학교 1학년 교과서, 80년대에 나온 블루마블 게임의 초기 버전 등이 경매에 나와 있다. "핑클 CD전집도 있어요. 구한말 미술품부터 90년대 음반까지 한국 근현대사 물건을 전문으로 취급합니다." 코베이 온라인사업부 팀장 정빛나리 씨의 말이다.

코베이에 나와 있는 물건들 중에는 후에 가격 상승을 기대할 만한 것들도 있다. 오명희 화백의 그림이라든지 하나밖에 안 남은 고문서 같은 것들은 투자 효과를 노려봄 직하다.

투자 목적이 아닌, 그저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한 소소한 물건들도 그 못지 않게 인기다. 3일 시작가 1만원으로 경매에 들어간 만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 화보집은 10일 6만원까지 가격이 올랐다. 치열하게 경쟁 중인 입찰자 12명은 그 시절 영화 '우뢰매'의 3단 변신을 따라 하기 위해 아무도 없는 장소를 골라 동네를 뛰어다닌 꼬마들일 게다.

"20~30년대 물건들은 귀하긴 하지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없죠. 정작 사람들에게 감흥을 줄 수 있는 건 한때 실제로 자기 삶을 차지했던 물건들 아닐까요." 정빛나리 팀장은 근현대 물건들이 각광 받는 이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재미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 속도에 가속이 붙으면서 물건들이 과거로 밀려나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는 사실이다. 삐삐가 유물이 된 지는 이미 오래고, 어느새 아이팟마저 박물관 유리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회전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시장에서 아직 파는 물건이 박물관 에 전시되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같은 날 서울 동묘 앞 풍물시장에서는 장년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상인이 네비게이션을 팔고 있었다. 스마트폰의 네비게이션 앱이 활성화되면서 효용 가치가 거의 없어진 물건이지만 거래 현장은 진지했다.

"이거 시중에서 사려면 50만원은 주셔야 돼." "그래서 얼만데요?" "5만원."

비교적 젊은층은 코웃음을 쳤지만 할아버지들은 귀가 솔깃한 모양이었다.

"한 번 켜보시오. 작동 되는지 보게."

정상 작동을 확인한 노인이 5만원을 건네고 네비게이션을 챙겼다. 저 물건이 박물관에 전시되기까지는 아마 몇 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물건이 더 빠른 속도로 등장하고 사라지면서 '추억의 시절'의 정의도 바뀌었다. 30년 전의 과거에 열광하던 이들이 10년 전의 과거에도 열광하게 된 것이다.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과자와 휴대전화, 의류 브랜드에 대한 수다로 떠들썩하다. 추억이 풍성해진 것인지, 기억이 단축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