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이슈 】

[ESSAY] 젊은 목수들의 꿈

자운영 추억 2013. 9. 25. 19:22

  • 양창훈 현대아이파크몰 대표

  • 입력 : 2013.09.25 03:04

    공방 운영하다 백화점 입점한 두 젊은 목수 가구매장 ‘스타’로…
    ‘제대로 된 제품’ 약속 지키려 매장 접고 6개월 만에 회사 세워
    기성 세대가 따른 성공의 길 아닌 ‘나만의 길’ 가는 젊은이 많았으면

    
	양창훈 현대아이파크몰 대표
    양창훈 현대아이파크몰 대표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스티브 잡스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잡스'를 관람했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꿈을 한껏 펼치고 간 한 천재에게 왠지 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평소 잘 몰랐던 그의 인간적 면모에 무척 끌리기도 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잡스의 스탠퍼드대 연설 장면이 생각났다. 극장을 나서면서 그가 남긴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구하라, 항상 우직하라)"라는 말을 나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웅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지난해 만났던 두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년 초 봄을 맞아 백화점 매장 개편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매장을 어떻게 구성할까 고민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는데 가구 매장 한 쪽에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젊은이가 담당 바이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유난히 앳된 모습과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대학생 같은 옷차림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살짝 가까이 다가가 들어보니 "백화점에 입점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바이어와 아는 사이도 아니고, 누구의 소개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불쑥 찾아와 떼를 쓰고 있었다. 두 사람 중 나이가 많은 이는 30세로 목수이자 조그만 가구 회사 사장이었고, 다른 이는 두 살 아래 동생으로 역시 목수였다.

    두 젊은이는 손에 '가구매장 입점 계획서'를 들고 있었다. 담당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달랑 입점 계획서 한 장과 가구 사진 몇 장만 내밀면서 백화점 입점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이들이 얼마나 경험이 없는지를 보여주었다. 백화점은 수많은 브랜드가 고객을 잡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있다는 그들의 작은 공방 사진 한 장만 보고서 바이어가 매장 공간을 내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나는 그들의 당돌함이 싫지 않았다. 꾸밈없는 모습과 무모해 보일 정도의 당당함, 무엇보다 서류를 들고온 거친 '손'에 믿음이 갔다. 긁히고 찍힌 흉터가 남아 있었고, 외모와 달리 손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었다. 두 젊은이의 '꿈'에 베팅해보기로 했다. 가구 담당 바이어를 설득해 언제든 실적이 좋지 않으면 나가야 한다는 일종의 조건부로 귀퉁이의 작은 매장을 하나 배정하기로 했다.

    백화점 입점 후 그들이 보여준 성과는 놀라웠다.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내는 균일한 품질, 똑같은 모습의 상품과 달리 그들의 가구에는 억지로 다듬지 않은 '날것'의 매력이 있었다. 목재의 결을 그대로 살리면서 자연스러운 질감과 나무의 향을 제품에 고스란히 녹여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매번 다른 가구를 만들어 냈다. 불과 반년도 안 되어 같은 층 가구 브랜드 중에서 매출 1·2위를 다투는 '스타 매장'으로 떠올랐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진짜 '사고'를 쳤다. 돌연 백화점에서 철수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팔리는 상품이 너무 많아 제대로 된 가구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사가 잘되어서 나가겠다는 사람은 30년 가까이 유통업에 종사하는 동안 처음 봤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말릴 수도 없었다. 두 청년은 그렇게 "제대로 된 가구를 만들 수 있을 때 다시 돌아오겠다"며 매장을 철수해버렸다.

    그리고 반년 뒤 두 젊은 목수는 거짓말처럼 다시 나타났다. 한데 이들은 더 이상 작은 공방의 점주가 아니었다. 체계가 제대로 잡힌 어엿한 가구 회사의 사장과 임원이 되어 있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서울 홍대 앞과 강남에 매장을 냈고 부산에 공장까지 세웠다고 했다. 직원도 13명이나 됐다. 그들은 백화점에 이야기한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제대로 된 가구를 만들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도 지켜냈다.

    영화 '잡스'를 보고서 두 사람이 떠오른 것은 두 젊은 목수의 꿈도 잡스 못지않게 크고 아름답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잡스가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말한 그대로 무모하리만큼 우직하게 꿈을 실현해 가고 있었다.

    우리 세대에게 성공이란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회사를 다니고 그곳에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비전과 자신의 꿈을 동일시하고 이를 위해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젊은 목수들은 이런 천편일률적인 길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길을 선택했다. 한 사람은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한 사람은 아예 대학에 가지 않았다. 잡스도 대학을 중퇴했다.

    나는 우리 세대가 젊은이들이 꿈을 키워나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본다. 우리는 혹시 기성세대의 성공 방정식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스티브 잡스 같은 스타가 탄생하기를 바라면서, 과연 그런 스타가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나 기회는 제공하고 있는가. 작년 봄 백화점의 가구 담당 바이어가 끝까지 그들의 입점을 거부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잡스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스개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매장을 둘러보며 멀리서 가구 매장을 바라본다. 젊은 목수들은 여전히 대패와 망치로 깎고 다듬은 목재의 거친 표면 위에서 자신들의 꿈을 개척하고 있다. 이런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