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비·환경

[Why] [달팽이 박사의 생명 이야기] 식물이라 얕보지 마라, 사람보다 먼저 근친교배 폐해 알았으니

자운영 추억 2013. 7. 6. 07:19

 

  • 권오길·강원대 명예교수

  • 입력 : 2013.07.06 03:11

    꽃에는 제 꽃송이에 암술과 수술이 다 있는 양성화(兩性花·암수갖춘꽃)와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단성화(單性花·안갖춘꽃)가 있다.

    단성화는 호박·오이·수박처럼 한 포기에 암수 꽃이 따로 열리는 자웅동주(雌雄同株·암수한그루)와 은행나무같이 숫제 암수 나무가 별도인 자웅이주(雌雄異株·암수딴그루)가 있다. 그리하여 "은행나무도 마주 서야(봐야) 연다"고 하는 것. 이렇게 암수딴그루인 목본(나무)에는 은행 말고도 비자나무·주목·버드나무·뽕나무·초피나무·다래 등등이, 초본(풀)엔 드물지만 환삼덩굴·수영·시금치가 있다.

    
	암·수술의 길이가 다른 메밀꽃
    암·수술의 길이가 다른 메밀꽃. 식물의 암·수술은 자가수분을 피하려고 수술의 길이나 성숙 시기가 다르다. / 조선일보 DB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읊조리셨지. 스웨덴의 국보요, 학명(이명법)을 창안해낸 분류학의 비조(鼻祖) 린네도 짐짓 꽃을 무척 좋아했다 한다. 선생은 양성화를 빗대어 "가운데 아리따운 여자(암술) 하나를 두고 둘레에 여러 남자(수술)가 빙 에워싸고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했다.

    별 시답잖은 소리 다 한다고 하겠지만 제대로 정곡을 찔렀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 아니던가? 더군다나 동물은 바깥 생식기를 사타구니에 끼워 놓는데, 어째 꽃식물은 해괴망측하게도 벌건 대낮에 덩그러니 드러내 머리에 이고 있담.

    게다가 꽃은 벌레를 꾀어 끌려고 곱디고운 색옷을 입었고, 짙은 향기를 풍기니 그것은 다름 아닌 '호르몬'이요 '페로몬'이렷다. 세상에 공짜 없으니, 곤충은 꿀물을 빤 대신 암술머리에 꽃가루를 묻혀주니 서로 주고받기다. 그런데 꽃냄새도 힘들여 만들었기에 함부로 아무 때나 발산하지 않는다.

    봉접(蜂蝶)에게 수분(受粉·꽃가루받이)을 맡기는 꽃은 한낮에, 밤벌레 나방이에게 신세 지는 꽃은 야밤에 향내를 날린다. 그리고 풋나무는 가만히 있다가도 사람이 툭 치거나 만질라치면 풀냄새를 벌컥 내뱉는다. 소위 제라늄이나 허브 따위가 심한데, 이는 천적(원수)이 자기를 해치러 온 줄 알고 쫓아버리려고 내뿜는 '독가스'다.

    그나저나 식물이라고 얕봤다는 큰코다친다. 암술과 수술이 길이 차이를 내거나 성숙 시기를 달리하므로 제 꽃의 꽃술끼리 수분(자화수분)을 피하며, 수분이 일어났다 쳐도 아예 수정(受精·정받이)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꽃에서는 물론이고 같은 그루의 어떤 다른 꽃과도 정받이하지 않으니 이를 자가불화합성(自家不和合性)이라 한다.

    세상에, 놀랍고 무섭다. 식물이 뭘 알고선. 그래서 "과일나무를 심어도 여럿 심어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예외가 더러 있어서, 꽃가루를 적게 만들면서 꽃냄새도 내지 않는 벼·보리·밀·완두·목화·상추는 자가수분(自家受粉·제꽃가루받이)한다.

    아무렴 영민하긴 동식물이 하나도 다르지 않지. 달팽이나 지렁이는 말할 것 없고, 하물며 회충이나 촌충 같은 기생충도 자웅동체(雌雄同體·암수한몸)이면서도 짝짓기하여 다른 개체의 정자를 받는다. 우리는 근친교배하면 이따금 악성 형질 자손이 생긴다는 것을 느지막이 배워 우생학을 논하게 되었고, 드디어 근친결혼을 피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만 해도 '동성동본은 결혼 불가'였으나, 이젠 '8촌 이내의 혈족끼리 불가'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땅히 식물계도 일정한 질서와 규칙이 있는 법이니, 외떡잎식물은 번식기관(꽃잎·꽃받침·수술)의 개수가 3의 배수이고, 쌍떡잎식물은 4와 5의 배수다. 마음 다잡고 들꽃에 가까이 다가가 오래오래 세세히 살펴볼 것이다. 자세히 봐야 예쁘고 오래 봐야 사랑스럽다. 모름지기 자연은 자기에게 눈길을 주는 이에게만 비밀의 문을 열어준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