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비·환경

비굴하게 살지 않겠다”는 이름 가진 물고기

자운영 추억 2012. 4. 12. 22:06

황선도 2012. 04. 06
조회수 38616 추천수 1

황선도 박사의 물고기 이야기 ③ 조기

서해 대표 생선, '으뜸 물고기'에서 이름 유래

조기떼 우는 소리로 밤잠 설치던 칠산 바다…자원회복과 생태관광으로 되살려야 

 

03451418_P_0.jpg

▲조기를 말리기 위해 엮어놓은 모습. 사진=정용일 기자


서해의 대표 생선 조기
 

동해에서 명태가 남해에서 멸치가 유명하다면 서해에서는 조기가 으뜸이다. 조기는 특유한 맛을 지니고 있어 예로부터 고급 생선으로 지목되어 왔다.

 

사실 조기라고 하면 참조기를 가리키는데, 배 쪽 빛깔이 황금색을 띠고 있어 다른 조기류와 구별할 수 있다. 일반인들은 ‘영광굴비’라고 하면 더 잘 알 것이다. 그 굴비를 만드는 조기가 참조기이다.

 

조기라는 이름은 한자로는 물고기 중 으뜸가는 물고기라는 종어(宗魚)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종어라는 발음이 급하게 발음되어 조기로 변했다는 것이다.

 

조기라 부르게 된 뒤에는 사람의 기(氣)를 돕는 생선이라는 뜻으로 조기(助氣)라고도 하였다. 이렇게 조기는 생선 중의 으뜸으로 쳐 제사상에 오를 자격을 얻었는데, 조상을 대신해서 후손들에게 사덕(四德)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한다. 조기가 보여주는 네가지 덕이란, 이동할 때를 정확히 아는 예(禮), 소금에 절여도 굽지 않는 의(義), 염치 있고 부끄러움을 아는 염(廉), 더러운 곳에는 가지 않는 치(恥)가 그것이다.
 

또한 조기는 머리에 돌이 있다 하여 석수어(石首魚)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조기 머리를 발라 먹다 보면 하얀 돌맹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혹 먹다가 잘못해서 이빨이 부러진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철렁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earstone.jpg

▲참조기 이석, 나이를 알 수 있다. 사진=서해수산연구소 박지영.

 

사람의 속귀에 몸의 방향과 평형을 유지시켜주는 세반고리관이 있듯이 물고기도 이 뼈가 그와 같은 구실을 하는데, 귀에 있는 돌이라 하여 이석(耳石, 귓돌, ear bone)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이석은 평평하게 생겨서 편평석(扁平石, statolith)이라고도 부르고 자르거나 갈아서 단면을 보면 나무 나이테와 같이 원형의 나이테가 있어 물고기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기의 이석은 울퉁불퉁한 다차원 모양을 하고 있어 정말 '짱돌' 같다. 이와 같이 성장축이 일정하지 않아 2차원의 단면을 보기가 어려워서 참조기 나이를 세는 실험을 할 때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참조기의 친척 구별법…수조기, 보구치, 부세, 강달이, 민어
 

chamjogi.jpg

▲참조기. 사진=최윤 군산대학교 교수 

 

참조기(학명 Larimichthys polyactis)는 영어로 'small yellow croaker' 일본어로는 키구찌(キぐち), 한자로는 소황어(小黃魚)로 쓴다. 참조기를 포함하는 민어과 어류는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구분이 어려워 때때로 잘 속는다. 명색이 물고기 박사인 남편을 둔 필자의 아내도 장인 제사 때 동네 시장에서 수조기를 참조기라고 속아 산 적이 있으니 말이다.

 

수조기는 몸 옆줄 아래 검은 점이 사선의 줄무늬를 띠고 옆줄 위쪽의 점들은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으며, 턱 아래에 5개의 구멍이 있어 구별이 쉽다.

 

su+bo.jpg

▲수조기(왼쪽)와 보구치. 사진=김병직 국립생물자원관 박사, 
 

또 시중에 싸게 많이 유통되는 조기로 ‘백조기’라 부르는 보구치가 있는데, 몸 빛깔이 은백색을 띠고 아가미 두껑에 검은 반점이 있으며, 턱 아래에 6개(좌우 3쌍)의 구멍이 나 있어 구분할 수 있다.

 

한때는 참조기를 대신해서 속여 팔았던 부세라는 조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세가 잘 잡히지 않아 오히려 참조기보다 값을 더 쳐주는 몸값 귀하신 몸이 되었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는 세상 이치의 한 본보기이다.

 

min+bu.jpg

▲민어(왼쪽, 김병직 국립생물자원관 박사)와 부세(사진=최윤 군산대 교수).

 

사실 참조기와 부세는 몸의 배 쪽 빛깔이 황금색이고, 가슴지느러미가 노란색을 띠어 언뜻 보기에는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참조기는 등지느러미가 시작하는 부위에서 옆줄까지의 비늘 수가 5~6개로 8~9개인 부세와 구별되고, 뒷지느러미 연조(연한 가시)의 수가 참조기는 9~10개인가 하면 부세는 7~9개이며, 참조기는 입 안이 검은데 비해 부세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참조기는 머리 부분에 다이아몬드 무늬가 발달하였으며, 옆줄 아래의 각 비늘에 황록색의 알갱이 같은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조기와 함께 비싼 값에 팔리는 민어는 사람들이 보통 크기로 구별을 하여 큰 것은 민어라고 하는데, 크기는 성장하면서 변하는 것이라 어릴 때는 구별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민어(Miichthys miiuy, brown croaker, ホンニベ)는 참조기, 부세와 달리 몸 빛깔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흑갈색을 띠지만 배 쪽은 회백색이고 지느러미의 가장자리는 검은색을 보인다.

 

nun+whang.jpg

▲눈강달이(왼쪽)와 황강달이. 사진=김병직 국립생물자원관 박사

 

같은 민어과 어류로 크기가 작아 젓갈로 이용되는 강달이 종류의 물고기가 있다. 그중 눈강달이는 머리 위에 초생달 모양의 두 갈래 돌기가 있고 아가미뚜껑에 검은 반점이 있으며, 뒷지느러미 시작 부위에 낚시바늘 모양의 구부러진 가시가 튀어나와있다.

 

그런가 하면, 황강달이는 머리 윗부분에 돌기가 4개로 갈라져 있어 왕관 모양을 하며, 아가미 뚜껑에 검은 반점이 없고 뒷지느러미 제 1가시가 곧은 것이 특징이다. 시중에서 이들을 합쳐 ‘황세기’라는 젓갈을 만드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황세기는 황강달이의 옛날 한자식 표현인 ‘황석어(黃石魚)’의 변형된 이름일 것이다. 

 

율도국 조기 파시의 재현을 꿈꾸며 

 

04115044_P_0.jpg

▲칠산과 연평도의 조기 파시가 사라진 지는 오래 됐다. 2011년 겨울 목포 삼학도 선착장에서 어민들이 조기 떼기 작업을 하고 있다. 이병학 기자 


어민들은 참조기 떼가 올라오는 시기를 예견하는 놀라운 삶의 지혜를 체득하고 있었다. 전라도 칠산 앞바다에서는 해마다 늙은 살구나무에 꽃이 피면 참조기가 연안에 찾아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아 살구나무 개화시기로 참조기 조업 시작을 점쳤다고 한다.

 

또한 영광 법성포 건너편 구수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칠산 바다에 조기 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고 고기잡이를 시작했다고도 한다. 식물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두 꽃의 개화시기가 같은지는 알 수 없으나, 자연과 생활이 조화된 우리네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조기는 제주도 남서쪽의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지내고 북상하기 시작하여 제주도와 추자도를 거쳐 3~4월께 전라도 칠산 앞바다, 그리고 한달 뒤인 4~5월에는 서해 중북부에 위치하는 옹진군 연평도에 이르러 산란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칠산 앞바다는 어디인가? 지도상에 딱히 칠산이라는 지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단지, 영광군 백수면 앞바다에 일곱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모여 있어 이곳을 칠뫼라고 부르며, 여기서 시작하여 법성포 앞바다를 거쳐 전라북도 고창군 곰소만, 부안군 위도, 군산시 새만금 남측 방조제 앞에 있는 비안도에 이르는 해역을 ‘칠산바다’라 부른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근 우연한 곳에서 칠산바다의 실마리를 찾을 수가 있었다. 올해부터 연안 바다 목장 조성 사업을 하고 있는 부안군 위도에 ‘파장금’이라는 지명이 있고, 이곳에서 조기 파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조기떼가 몰려올 때면 포구에 배를 댈 수 없을 정도로 전국에서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어 흥청망청하였다.

 

위도는 전설의 섬이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이 세워졌던 곳, 1993년 10월 10일 서해페리호 침몰사건이 난 곳, 2003년 위도 방폐장 반대 시위 등 과거와 현대사에 시련이 많았던 곳이다. 이제 이곳에 수산자원을 조성하고 생태관광을 발굴하여 다시금 파시가 형성되고 율도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거듭나길 희망한다.

 

이젠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산란시기가 되면 이곳 칠산 앞바다에서 조기 떼가 우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참조기 같은 민어과 어류를 잡아보면 입 밖으로 풍선껌을 하나 불어 물고 있는데, 이것은 저층에 사는 어류가 어획되어 갑작스럽게 수면 위로 끌어 올려지면 수압의 차이로 부레가 삐져나온 것이다.

 

조기 떼가 우는 소리는 이 부레에서 나는 소리이다. 참조기는 평소에는 바다 바닥 가까이에 살지만, 산란할 때가 되면 수면 가까이로 떠올라 떼를 지어 다니며 부레를 폈다 오무렸다 하며 소리를 내는 습성이 있다. 산란장에 들어올 때 울고, 산란할 때 울고, 산란을 마치고 나갈 때도 운다.

 

조기가 울음 소리를 내는 이유는 수컷과 암컷이 산란장에 들어가고 나올 때 서로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는 일종의 구혼의 신호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조기 떼를 찾기 위해 구멍 뚫린 대롱을 바닷물 속에 넣은 뒤 반대쪽을 귀에 대고 조기 우는 소리를 들어 조기 어군의 규모를 탐지하였다고 한다.

 
산 앞바다 참조기는 ‘영광굴비’로 밥상에 오른다
 

산란 직전에 잡힌 조기라 알이 꽉 차 있고 살이 올라 배에 황금빛이 난다. 특히 곡우절(양력 4월 20일께)에 잡힌 조기는 ‘오사리 조기’ 또는 ‘곡우 살 조기’라 하고, 이것으로 만든 굴비를 ‘오사리 굴비’라 한다. 어찌나 맛이 있는지 ‘밥 도둑’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맛과 품질이 뛰어나 궁중에 진상했다고 한다. 이때도 백성들은 비싼 조기를 맛보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아는 ‘자린고비’ 얘기에 소금에 아주 짜게 절인 굴비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본받을 '자린고비 정신'

 

 03217927_P_0.jpg

 

자린고비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실제 인물로써 지금의 충북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 증삼마을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조륵이다. 자린고비하면 생각나게 하는 것이 바로 굴비이다. 제사에 쓰고 난 조기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반찬 삼아 밥을 먹으면서 식구들이 어쩌다 두번 이상 쳐다보면 “얘, 너무 짜다 물켤라”고 호통쳤다는 이야기.

 

며느리는 생선 장수가 왔는데 생선은 사지 않고 생선만 만지작거리다가 들어와 손을 씻은 물로 국을 끓였는데, 자린고비가 하는 말이 물독에다 손을 씻었으면 몆끼를 더 먹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했다는 일화도 있다.

 

또 장독에 앉았다 날아간 쉬파리를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깝다며 단양 장벽루까지 쫒아갔다는 일화. 뿐만 아니라 무더운 여름철에 부채를 사다 놓고 그 부채가 닳을까봐 벽에 부채를 매달아놓고 머리를 흔들었다는 수없는 기행. 

 

일화 중에 하나인 전라도에서 소문난 구두쇠가 조륵의 소문의 듣고 겨루려고 찾아와 하룻밤을 묵는데 저녁 때 밥풀 몇 알을 남겼다가 자기가 가져온 창호지 조각을 바람 들어오는 창 구멍에 붙이고 잤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손님은 “조 선생, 문에 발랐던 종이는 내것이니 가져 가렵니다”라며 창호지를 뜯어 집을 나선 뒤 5리쯤 되어서였는데, 조륵이 헐레벌떡 뛰어와 “종이에 붙은 밥풀은 우리 것이니 놓고 가야 합니다”며 칼로 밥풀 붙였던 자리를 긁어내 담아 가지고 돌아가니 전라도 구두쇠는 “과연….” 이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 하는 등 수많은 이야기가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한 덕택에 자린고비 나이 이순(60세)에 만석꾼이 되었단다. 그는 지독하게 인색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했으나, 환갑이 되는 날부터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자린고비는 그 동안 억척스럽고 피나게 모은 재산을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혀진다. 

 

조륵이 가뭄으로 3년 동안 기근에 시달리던 영호남 1만여 가구에 구휼미를 베풀었는데, 이에 감화를 받은 경상, 전라 현감들이 ‘자인고비(사랑할 慈, 어질 仁, 아비 考, 비석 碑)‘라는 송덕비를 잇따라 세웠다고 한다. 조정에서도 그의 자비정신을 높이 평가해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죽은 후 검소하게 장례를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식에게는 아무런 재산을 남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자린고비 어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가 전해 오고 있다. 충주에 이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는 종이를 아끼기 위해 부모님 제사를 지낼 때 붙였던 지방(紙榜)을 태워버리지 않고 해마다 제사 때가 되면 다시 꺼내 쓰니 기름때가 묻어 절여졌다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고(考)자와 돌아가신 어머니 비(妣)자가 쓰여진 지방이 기름에 쩔었다 하여 ‘절인고비’에서 ‘자린고비’로 변했는 설도 있다.

어원은 어찌되었든 요즘 같이 재벌들의 상속편법이 만연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탐하는 시대에 이제라도 근검절약하고 남을 도우는데 아끼지 않는 자린고비 정신을 본보기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00878799_P_0.jpg

▲전남 영광 칠산 앞바다. 오른쪽에 섬이 나란히 늘어선 섬 앞에 갯벌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사진<한겨레> 사진 디비. 

 


칠산 바다 조기가 맛있는 이유는 이곳에 갯벌이 드넓게 발달되어 있어 영양염이 풍부하여 먹이생물이 많고, 수심이 얕아서 조기의 산란장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어패류는 산란 직전이 가장 맛있는데, 이것은 산란을 대비하여 영양소를 축적한 결과이다.

 

산란이 시작되면 영양성분이 난소나 정소로 옮아가기 때문에 지질함량이 줄어들고 몸이 여위게 된다. 영광 사람들은 칠산 바다에서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조기는 연평도 앞바다까지 북상하는데, 여기서 잡힌 놈들은 산란 후의 늘그막한 조기라 빛깔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고 한다.

 

지금은 조기가 연평도로 북상하기도 전에 다 잡아버려 연평도 참조기 맛을 볼 수가 없어 확인할 길이 없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참조기는 지금도 영광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맛은 어류 중에서 제일로 꼽을 정도다. 그런데 영광조기보다는 영광굴비로 더 잘 알려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엄격히 따지면 생선이 마르지 않은 상태는 조기, 염장해 말리면 굴비라고 부른다.

  
굴비의 유래

 

03380912_P_0.jpg

▲영광굴비를 말리는 모습. 사진=<한겨레> 사진 디비. 

 

굴비라는 이름은 고려 때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은 셋째와 넷째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고 세도정치를 하던 중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가 척준경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정주(지금의 영광)로 쫓겨나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조기가 너무 많이 잡혀 내다 팔기도 하고, 소금에 간하여 말려서 보관해 두었다가 먹기도 했다. 말린 조기가 감탄할 만큼 맛이 좋아 이자겸은 임금님께 면죄부를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임금이 생각나서 조기를 진상하였다.

 

이자겸은 마른 조기에 '정주굴비'(靜州屈非)라는 네 글자를 써 붙였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굴비라는 말이 생기게 된 유래이다. 이자겸이 마른 조기에 굴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은 ‘비(非)에 굴(屈)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것이었다. 이자겸의 뜻은 임금에게 전해졌고, 결국 굴비라는 말 한마디로 인해 귀양살이에서 풀려났다고 한다.  


 원래 ‘영광굴비’라 함은 영광군 칠산 앞바다에서만 잡은 산란 전의 참조기를 소금으로 염장하여 말린 것을 가리켰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산자원이 전반적으로 고갈되고 칠산 앞바다의 참조기 어획량 또한 급격히 줄어들면서 몸값이 치솟으니 수입된 중국산 조기나 원양산 조기를 가공하여 영광굴비란 이름으로 생산되는 경우도 있었다.

 

늘 그렇지만 돈이 되는 곳에는 변칙이 난무하는 법, 심지어 여기저기서 소위 ‘짝퉁’ 영광굴비가 쏟아져 나와 유통질서가 엉망이 되었다. 이쯤되니 이런 제품을 과연 영광굴비라 할 수 있을지 논란이 일고, 한때 영광굴비의 진위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영광군내에서 어업인 스스로 자정노력을 하고 영광굴비를 다른 굴비와 구별할 수 있도록 자구책을 마련하여 ‘굴비의 영광’을 유지시키고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영광굴비가 인기를 누리는 것은 칠산 앞바다에서 조업한 어선이 조기를 부리던 항구인 법성포가 굴비를 건조하기 적합한 자연조건과 그 지역 주민에게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는 특유의 가공 비법이 있기 때문이다.

 

잡아온 참조기를 일년 이상 간수가 빠진 천일염으로 적당한 염기의 소금물을 만들어 수차례 염장, 그리고 6개월 이상 숙성, 이렇게 천천히 정성을 들여 조기에서 굴비로 탈바꿈을 하는 것이다. 법성포의 갯바람은 낮에는 습도가 낮고 밤에는 높은 습도를 몰고 와 한낮에는 건조가 이루어지나 밤에는 어체 내부의 수분이 급격히 마르지 않게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해풍, 습도, 일조량 등이 적절한 셈이다. 따라서 영광굴비는 단지 영광에서 나는 굴비라기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맛있는 굴비라는 보편적인 뜻을 얻게 되었다.

 

00609957_P_0.jpg

▲영광 굴비 백반. 사진=<한겨레> 사진 디비.


이러한 '슬로 푸드'인 굴비가 서구문화의 패스트 푸드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비단 굴비뿐만 아니라 생선류 대부분이 이러한 실정이다. 비만이 늘어나고, 10대들에게 조차 성인병이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 서구음식에 길들여져 있는 현실을 부모들이 나서서 타파해야 한다.

 

식단을 육류 중심에서 생선과 채소로 교체한다면 어린 아이들의 질병 예방은 물론 청소년기 두뇌 발달에도 좋다는 것은 굳이 물고기 박사가 강조하지 않아도 상식이 되었다.
  

음식도 시대에 맞게 진화를 한다. 필자가 근무하는 군산의 한 일식집, 어느 어업인이 제안해서 만들었다는 음식이 있다. 지인들과 함께 정갈한 일식 안주로 술 한잔을 하게 되었는데, 마지막에 나온 식사가 완전 우리 식. 얼음이 둥둥 뜬 녹차물에 찬밥 한술을 말아 나왔는데, 함께 딸려 나온 것이 굴비였다.

 

꾸덕꾸덕 마른 굴비를 방망이로 두드려 쪼개서 뼈를 다 발라내고 찢어 내왔다. 물 만 밥 숟가락 위에 굴비 한점을 얹어 오물오물 씹으니, 그 옛날 어머니가 한여름 점심상에 내오셨던 바로 그 맛이었다. 술기운에 열이 나 있는 몸은 찬 녹차물에 만 찬밥, 그리고 그 위에 얹은 굴비 한 점이 어울어져 술끝 기분을 ‘쿨하게’ 만들었다.

 

황선도/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한국수산자원관리공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