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이슈 】

[앙코르 내 인생] 삼성전자에서 28년간 근무한 뒤초등학교 교사 된 경기현(62)씨

자운영 추억 2011. 6. 25. 21:34

 

62세, 난 7년차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대기업 영업맨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정년 뒤 교사에 도전했다
아이들과 운동장 뛰고 비빔밥 만들어 먹는 게 너무 행복하다

"자, 내일은 우리 반 모두 '한솥밥' 먹는 날이다. 비빔밥 만들 테니까 나물이랑 고추장, 들기름, 그릇, 수저 챙겨와야 돼. 5월에 생일 맞은 친구들 파티도 여니까, 생일카드에 뭐라고 쓸지 생각해 와."

집에 갈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잠시도 엉덩이를 붙여두지 못하고 들썩거린다. 몇몇은 아예 가방부터 멨다. 오늘은 유난히 잔소리가 많아지는 날이다. '한솥밥 먹기'는 점심 급식이 없는 토요일에 우리 반만 갖는 행사다. 한 달에 한 번 케이크를 사다 놓고 여는 생일잔치 소식에 아이들은 벌써부터 신이 났다.

나는 충청남도 천안시 신대초등학교 3학년 3반 담임선생님이다. 7년차 62세 교사로 아들·딸뻘인 선생님들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들뜬 녀석들을 겨우 진정시켜 다음 날 준비물과 주의사항, 숙제를 일러주고 나니 '휴, 오늘도 하루가 끝났구나' 안도감이 든다. 그와 동시에 일기와 숙제 검사, 성적 채점 등 혼자 교실에 남아 처리해야 할 일의 목록이 차례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1989년~1991년 삼성전자 일본지사에 근무하던 시절 히로시마 원폭 피해 유적지를 찾았다.

나는 1976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004년 삼성전자로지텍 경영고문을 끝으로 정년퇴임했다. 나는 퇴임 직전까지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을지 꿈에도 몰랐다. "여보, 당신도 교사자격증 있잖아요. 나랑 같이 남은 삶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며 보냅시다." 장롱 깊숙이 처박혀 있던 '교사자격증'을 먼저 떠올린 것은 초등학교 교사 출신인 아내였다.

요즘 후배들이야 회사 다니며 자기계발도 하고 이것저것 자격증도 준비한다고 하지만, 우리 때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직장을 옮기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고, 회사에 충성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대학 3학년 때 친구 손에 이끌려 교사자격증 시험을 봤던 것이 늘그막에 도움이 될 줄이야…. '아, 한때 나도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꿈을 꾸었지' 젊은 시절 가슴 한편에 품었던 꿈이 다시 떠오르자 마음이 설��다.

우리 부부는 충남교육청 임용고시에 응시했다. 서울은 응시 자격이 45세 이하로 제한이 있었지만, 충남은 그게 없었다. 내가 회사에서 일본지사로 발령나면서 교편을 놓았던 아내도 함께 도전했다. 서울 노량진의 임용고시 학원에 등록하고 고3 수험생처럼 3개월 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그해 11월 '2005년 충남 임용고시 합격자' 명단에 우리는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정말 정신없이 살았다. 1976년 11월 내가 삼성전자에 입사할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흑백TV밖에 없었다. 1978년 첫 컬러TV가 나오는 것을 지켜봤고, 1980년대로 접어들어 집집마다 컬러TV와 냉장고, 세탁기를 갖추기 시작한 그 시절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만드는 족족 물건은 팔려나갔고, 그 사이 기획실과 전자사업본부, 영업본부, 일본지사, 비서실 등 여러 곳을 거쳤다. 1991년 일본지사에서 돌아온 후에는 일본의 전자양판점 판매 시스템을 국내에 도입하는 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 그것이 전국 곳곳에 만들어진 삼성전자의 '리빙플라자'다. 이후 나는 삼성전자의 물류를 전담하는 삼성전자로지텍으로 자리를 옮겨 정년을 맞을 때까지 일했다.

삼성전자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경기현씨는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 운동장에서 그가 맞잡은 손을 번쩍 들자 아이들은 풀쩍 뛰어올랐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오후 3시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빈 교실에 혼자 남아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주위에선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라고 말하지만, 편한 삶은 아니다.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함께 뛰거나 늦은 시각까지 남아 잡무를 처리하려면 체력도 길러야 한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따르는 아이들 앞에서 '할아버지' 느낌이 들지 않게 하려고 염색도 빼먹지 않는다. 아침 7시 40분쯤 교실에 나와 한 명 한 명 아이들을 맞는 것은 무척 즐겁다. 가끔은 임원이 된 후배에게 부탁해 삼성전자 LCD공장 견학도 다녀오는 등 옛날 인맥도 조금씩 활용한다.

맨 처음 부임해 맡았던 6학년 아이들은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 됐다. 말썽쟁이 몇몇은 지금도 눈에 밟힌다. 아빠 엄마가 이혼했거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한테는 마음이 더 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씩 나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녀석들이 스승의 날이라고 찾아올 때면, '아 이런 맛에 선생님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젖는다.

내년이면 교사 생활도 정년을 맞는다. 누구는 인생에서 두 번이나 정년퇴임을 하는 호사를 누린다고 부러워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쉽다. 이제 교직이 뭔지 알 만하니까 물러날 시간이 된 것이다. 인생은 항상 이렇게 뒤늦게 깨달음이 온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3막'을 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준비 없이 맞은 2막과 달리 3막 인생은 사회에 도움이 되고 아내도 함께 할 수 있는 일로 찾고 있다.

앙코르 내 인생 관련 기고 이메일 encor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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