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蘭·분재·화초

조선시대 선비들의 꽃 가꾸기 지침서 "양화소록"

자운영 추억 2014. 4. 11. 21:45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 사진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예요. /한국저작권위원회

1456년,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인물들이 세조 앞에 나아가 심문과 고문을 받을 때였어요. 세조는 성삼문에게 "강희안도 함께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심문받는 내내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며, 신하는 자기가 섬기는 왕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법'이라고 세조에게 당당히 말하던 성삼문이었어요. 그러나 세조가 강희안이란 인물을 가리키며 함께 반역을 도모했느냐고 묻자, 성삼문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세종께서 아끼던 신하를 모두 죽일 셈이오. 그는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참으로 어진 사람이올시다." 강희안은 성삼문의 강력한 부인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강희안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과 마찬가지로 집현전 학자 출신이에요. 정인지 등과 한글 28자를 해석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석을 붙였으며, 성삼문, 최항 등과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했어요. 또한 강희안의 어머니는 심온의 딸로,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 심씨와 자매 사이였어요. 그러니까 세종은 강희안의 이모부가 되고, 세종의 아들인 세조는 강희안과 이종사촌이 되지요. 강희안은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안견·최경 등과 함께 '삼절(★)'이라 불리기도 했어요.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조선 문인화(★)의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또한 그는 꽃 가꾸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자기가 가꾸는 꽃과 식물을 자세히 관찰하고 잘 가꾸는 법을 연구하여 책을 쓰기도 했지요. 그 책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로 알려진 '양화소록(養花小錄)'이에요. '양화(養花)'는 꽃을 가꾼다는 뜻이고, '소록(小錄)'은 작은 책자라는 뜻이지요. 강희안은 양화소록 서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어요.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사당 사진
사육신(死六臣)을 모신 사당이에요. 사육신이란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목숨을 바친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6명의 신하를 말해요. /문화재청

"아! 화초는 한낱 식물이니 지각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양하는 이치와 거두어들이는 법을 모르면 안 된다. 건조와 습기, 추움과 따뜻함을 알맞게 맞추지 못하고 그 천성을 어기면 반드시 시들어 죽을 것이니 어찌 싱싱하게 피어난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랴? 하찮은 식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러랴! 어찌 그 마음을 애타게 하고 그 몸을 괴롭혀 천성을 어기고 해칠 수 있겠는가?"

강희안은 화초를 가꾸는 것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이를 통해 건강하게 사는 법과 삶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이 책을 펴낸 뒤 화초 가꾸기를 소일(★)거리로 삼는 선비가 많아졌으며, 18세기에는 양화소록을 바탕으로 정원 꾸미기가 유행했다고 해요.

[1분 상식] '단종 복위 운동'이란 무엇인가요?

1453년에 수양대군과 그를 따르던 한명회, 권람 등이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지요. 그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 집현전 출신 학자들과 무관 유응부 등이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고자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김질의 배신으로 탄로 나 실패하였고, 그 일을 계획했던 사람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고 말았어요. 이때 목숨을 잃은 6명 신하를 가리켜 '사육신(死六臣)'이라고 해요.

★삼절(三絶): 시(詩)·서(書)·화(畵) 세 가지 모두에서 높은 경지를 이룸. 또는 그러한 사람.

★문인화(文人畵): 전문적 화가가 아닌 문인이 그린 그림. 주로 사대부 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가 그린 그림을 말함.

★소일(消日): 어떤 일에 마음을 붙여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