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전통】

[스크랩]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유택 - 심우장 [尋牛莊]

자운영 추억 2013. 9. 5. 12:12

지난 광복절 다녀온 심우장.....

성북동의 허름하고 좁은 골목을 조금 올라 자리잡은 심우장~

대문을 들어서자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이곳을 좋아하는 젊은 남녀가 방안에 앉아 이야기하는 소리다.

아주 더운날 앞뒤 방문을 활짝 열고 시원한 골바람을 맞으며 앉아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 참 평온해 보인다.

이렇듯 심우장은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간....

 

 

 

심우장 [尋牛莊]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유택.

1985년 7월 5일 서울특별시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만해(萬海) 한용운(1879~1944)이 살던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인데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평면에 팔작지붕을 올린 민도리 소로수장집으로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그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가 죽은 뒤에도 외동딸 한영숙이 살았는데 일본 대사관저가 이 곳 건너편에 자리잡자 명륜동으로 이사를 하고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연구소로 사용하였다.

이곳 성북동은 원래 성밖 마을 북장골, 한적한 동네였다.

만해는 3·1운동으로 3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성북동 골짜기 셋방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승려 벽산(碧山) 김적음이 자신의 초당을 지으려고 준비한 땅 52평을 내어주자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고 '심우장'이라고 하였다.

[출처] | 네이버 두산백과, 위키백과          [촬영장소] | 성북동

 

 

 

 

 

 

 

 

 

 

 

 

 

 

 

 

 

 

 

 

 

 

 

 

 

 

 

 

 

 

 

 

 

 

 

 

 

 

 

 

 

 

 

 

 

 

 

 

 

 

 

 

 

 

 

 

 

 

 

 

 

 

 

 

 

 

 

 

 

 

 

 

 

 

 

 

 

 

 

 

 

 

 

 

 

 

 

 

 

 

 

 

 

 

 

 

 

 

 

 

 

 

 

 

 

 

 

 

 

 

 

 

 

 

 

 

 

 

 

 

 

 

 

 

 

 

 

 

 

 

 

 

 

 

 

 

 

 

 

 

 

 

 

 

 

 

 

 

 

 

 

 

 

 

 

 

 

 

 

 

 

 

 

 

 

 

 

 

 

 

 

 

 

 

 

 

출처 : 야생초와 함께
글쓴이 : 뚝배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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