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러시아의 위대한 식량학자가 있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1887∼1943).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레닌의 후원 아래, 굶주림에 허덕이던 제 나라 인민들이 고루 배부른 세상을 꿈꾼 몽상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대륙을 쉼 없이 돌아다니며 러시아의 악천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작물을 찾고 또 찾았다. 그 길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났고, 또 그보다 많은 작물과 종자들을 만났다. 그 여정에서 국가의 지배와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종자를 재배하고 교환하고 개량해온 위대한 농부들도 여럿 만났다. 평소의 숙원이었던, 러시아의 기후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작물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더라도, 제 나라 정치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스탈린 체제에서 잘못된 농업 집단화로 수많은 인민들이 굶주리자,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 희생양을 찾던 독재자의 눈에 걸려서 결국 러시아 농업을 망친 부르주아 반동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이후 수많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죽음은 면하지만) 결국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존재.
어쩌면 너무 드라마틱한 생을 살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못한 말년을 제외하면 역사 속의 그 무수한 영웅들의 전형적인(통속적인!) 삶의 궤적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단하되, 나와는 별세계의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게리 폴 나브한 지음, 강경이 옮김, 아카이브 펴냄) ⓒ아카이브 |
바빌로프 하면, 개인의 이름임과 동시에 바빌로프 연구소와 한 몸으로 떠오르고 불린다. 곧 그가 오랫동안 오대륙을 주유한 결과물인 수백, 수천의 씨앗을 온존하게 보존한 곳, 바빌로프 연구소를 동시에 상기시킨다. 그와 함께, 1941년 9월에 시작된, 독일의 레닌그라드 봉쇄를 역사적 배경으로 갖는다. 900일간 계속된 봉쇄로 15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간. 당시 인류의 소중한 유산, 러시아 식량의 희망인 종자 보관소인 바빌로프 연구소, 그리고 그곳을 온힘을 다해 지킨 연구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제는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레닌의 초상화를 배경으로, 흐릿한 얼굴들이지만 한곳에 모여 있는 빛바랜 사진을 통해서나마.
이 책의 저자 나브한이 만난 바빌로프 연구소 연구원 알렉사니안 박사의 말을 옮겨본다.
"사진 속 인물 중에 알렉산더 스추킨은 경작지에 심으려던 땅콩 씨앗 자루를 손에 쥔 채 책상에서 숨을 거두었다오. 바빌로프가 수집한 귀리 종자를 책임졌던 릴리야 로디나는 아사했지요. 디미트리 이바노프도 아사했고. 그는 소중히 여기던 수천 자루의 벼 종자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다 죽었다오. 그리고 또 있다오. 스테글로프, 코발레스키, 레온옙스키, 말리지나, 코르준. 굶어 죽은 사람, 병마와 싸우다 쓰러진 사람, 포탄에 희생된 사람도 있었지요. 식물표본실 관리자였던 울프는 미사일 포탄에 맞아 피를 흘리다 숨졌고, 바빌로프의 현장일지 관리자였던 글레이베르는 귀중한 문서가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 손에 넘어갈까 두려워 끝까지 문서실을 지키다 죽었다오."
물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 그들의 생김이 어떠한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걸고, 또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바빌로프가 수집한 무수한 종자들이란 사실만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이렇게 우리는 바빌로프와 첫 대면을 한 셈이다. 비록 그만을 만난 건 아니지만, 그들을 만남으로써.
한편, 바빌로프와의 짧은 만남으로 인해 운명이 바뀐 이도 있었다. 바로 카자흐스탄의 과학자, 아이마크 잔갈리예프. 1929년 9월, 바빌로프는 카자흐스탄 지역의 야생 사과나무 숲을 조사하기 위해 그곳 지리에 밝고 현지 방언에 능한 열여섯 살 소년을 하룻밤 자신의 여행에 동참시킨다. 그때 만난 소년이 바로 70년 뒤에 나브한이 만난 바로 그이다. 잔갈리예프 박사는 오래전 그 만남을 생생히 기억한다.
"바로 그날 나는 이 학자와 함께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어요. 저는 혼자 이렇게 물었죠. 왜 우리의 야생 사과가 이런 천재의 관심을 끌까?"
그 후 소년은 열심히 공부하여 결국 러시아로 가 바빌로프와 함께 연구한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남은 생을 야생 열매 연구에 바친다. 결국, 잔갈리예프는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찾아 나머지 칠십 평생을 바쳤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이 바빌로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그 하룻밤, 소년이 느꼈을 설렘, 경이감은 얼만큼이었을까? 또 총총한 별을 보며 품었을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또 책에는 바빌로프가 만났던 장소, 농부들, 그리고 나브한이 바빌로프의 발자취를 좇아 여행하면서 다시 만났던 장소, 농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사이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리고 각각의 동인이 무엇이었나를 따져보며 글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바빌로프는 세계를 누비면서 파미르 고원에서 가뭄에 강한 '진드함 잘 닥'이라는 품종을 찾아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포 계곡에서 작물에 사용하는 수많은 속명(俗名)을 보고는 수천 년 동안 농부들이 지역 적응 품종을 찾아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깨닫기도 한다. 또 에티오피아의 독특한 생물문화유산, 사과나무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카자흐스탄의 숲, 미국인들도 몰랐던 토착 재래종 '악마의 발톱' 등을 찾아내 세상에 알리기도 한다.
한편, 그는 작물 다양성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지역의 종자를 교환하며 기후 변화에 대비하는 농부들, 오랫동안 숲을 가꾸며 식량을 얻어온 아마존의 원주민들, 수분이라곤 전혀 없는 모래언덕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호피족과 나바호족, 변화무쌍한 기후와 환경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단일한 작물을 심지 않고 여러 작물을 심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근원적 생명력과 지혜를 들려준다. 또 집단농장의 실패로 인한 소련의 대기근, 환금작물 재배로 식량안보를 잃고 만신창이가 된 레바논의 비극 등도 담담하게 들려준다.
그에 더해, 나브한은 기후 변화로 인해 파미르 고원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빌로프가 감탄해 마지않았던 풍요로운 작물의 요람이었던 이탈리아의 포 강이 왜 고통의 강이 되었는지, 천국과도 같았다고 바빌로프가 극찬한 사과나무의 기원지는 급속한 도시화에 떠밀려 어떻게 훼손되고 있는지, 유전자 조작 작물의 유입으로 옥수수부족들이 얼마나 고통에 처해 있는지, 다국적기업의 물 남용과 기후 변화로 사막의 호피족이 어떻게 변했는지, 산림 벌채와 소작으로 고통 받는 아마존의 잉가족까지, 자유무역과 기후 변화, 유전자조작작물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생물 다양성을 위협하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지만 나브한은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땅을 일구고 지키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는다. 기아를 겪은 뒤 국제단체가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종자를 거부하고 가뭄에 강한 전통종자를 심은 에티오피아의 농부들, 거대 종자회사가 씨앗을 지배하려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종자를 교환하며 저항한 파미르 고원의 농부들, 전쟁 중에도 활기를 띤 레바논의 '수크 엘 타예브'('선량함이 다스리는 시장'이라는 뜻) 등을 통해 작지만 소중한 희망을 읽는다. 각각의 이야기가 모두 절절한 사연을 담은 훌륭한 다큐멘터리감인데, 이렇게 주마간식 식으로 훑고 지나갈 수밖에 없어서 유감이다.
끝으로, 바빌로프가 걸었던 길을 간추려 적어본다. 바빌로프는 중국 내륙지역과 실크로드, 파미르 고원과 아프가니스탄의 평야를 방문했고, 동쪽으로는 이란과 이라크, 그루지야의 반건조 초원까지, 남으로는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지중해 건너 이집트와 튀니지, 모로코를 비롯해 지브롤터 해협 건너 에스퍄냐와 이탈리아, 그리스, 그리고 멀리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고원까지 찾아갔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아마존과 안데스 고산지대의 음식을 조사하고 수집하고 맛보았으며 칠레의 감자도 수집했다. 또한 브라질과 콜롬비아의 열대 저산지대를 깊숙이 탐험했을 뿐 아니라 파나마 지협을 건너 중앙아메리카와 멕시코, 카리브해 지방의 토착작물을 연구했다. 미국에서는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거쳐 뉴욕과 버지니아까지 여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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