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글·책 】

지식채널e 네 번째 묘

자운영 추억 2011. 2. 3. 00:57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안중근 의사

 

 

 

[ 백범과 3의사(義士) ]

 

■ 백정기 의사

 

“나는 몇 달을 더 못살겠다.

그러니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 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恨)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빙된 조국 땅 어디에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

 

백 의사는 전북 정읍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귀동냥으로 한문공부를 익혔습니다.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식견과 견문을 넓히던 백 의사는

1919년 3·1만세의거가 거족적으로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傳單)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선도하였습니다.

 

백 의사의 항일활동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1920년 다시 경성(현 서울)로 올라와 동지들과 함께

경인(京仁)간 일본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꾀하다가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신분을 광부로 위장하여 다행히 석방되었습니다.

그 후 각지를 잠행(潛行)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

거기서도 일본 군사시설 파괴에 전력하였습니다.

백 의사는 일제 당시 여러 방면의 항일투쟁 가운데

 전형적인 의열 투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23년 백 의사는 일왕을 처단할 계획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뜻밖에 이 해에 ‘동경대지진’이 발생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북경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듬해 1924년 백 의사는 중국 내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여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정의공보>를 발간하는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서 직공으로 근무하면서

중국인 노검파, 대만인 범본량, 아나키스트연맹 등과 손을 잡고

노동자들의 사상계몽에 진력하였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당시 백 의사를 따르는 군중이 십만 명을 헤아렸다고 합니다.

 

한편 1927년 중국 남경, 상해 등지에서 농민 자치운동을 전개하던 백 의사는

 ‘동방(東方)무정부주의자연맹’(1928년) 및

‘재북만(在北滿)무정부주의자연맹’(1930년) 창설 때

각각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투쟁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습니다.

 

또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백 의사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華南)아나키스트연맹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여

이연산 동지와 함께 천진으로 건너가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에 폭탄을 던져 대파시켰으며,

이밖에도 일본군 병영과 일본 총영사관을 폭파하기도 하였습니다.

 

백 의사의 대표적 항일투쟁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육삼정(六三亭) 의거’를 들 수 있습니다.

1933년 3월, 일본 군벌들이 당시 주중공사인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에게 거액을 주고

 열하성 일대에서 활동하는 항일독립군을 섬멸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아리요시가 중국내 친일분자들과 고급 장성들을 매수하기 위해

상해 공동조계(租界) 내에 있는 ‘육삼정(六三亭)’ 이란

고급음식점에서 비밀회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한 백 의사는

정화암과 상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지와 비밀회의 현장을 습격,

이들을 처단키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사전에 일경에 발각돼

불행히도 3인 모두 거사 직전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의거 후 일경에 체포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된 세 의사는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백 의사와 원심창 의사는 무기징역을,

이강훈(전 광복회장) 의사는 징역 15년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나가사키 시내 이시하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백 의사는 1934년 6월 5일 향년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고,

나머지 두 의사는 해방 후 귀국하였습니다.

 

백 의사의 유해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7월 6일

이봉창, 윤봉길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발굴,

국내로 봉환돼 국민장(國民葬)으로 천묘의식(遷墓儀式)을 치룬 뒤

효창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됐습니다.

 

 

 

 

■ 이봉창 의사

 

그저께 선생(김구)께서 해진 옷 속에서

많은 액수의 돈을 꺼내주시는 것을 받아 가지고 갈 때

눈물이 나더이다.

일전에 제가 민단 사무실에 가보니 직원들이 밥을 굶은 듯하여,

제 돈으로 국수를 사다 같이 먹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저께 같이 자면서 하시는 말씀은 일종의 훈화로 들었는데,

작별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돈뭉치까지 주시니 뭐라고 말을 못하겠더이다.

불란서 조계지에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하시는 선생께서는,

제가 이 돈을 가지고 가서 마음대로 써버리더라도

돈을 찾으러 못 오실 터이지요.

과연 영웅의 도량이로소이다.

제 일생에 이런 신임을 받은 것은

선생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1901년 8월 10일 서울 출생인 이 의사는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에서 점원 생활을 잠시 하였습니다.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가 코스를 마친 후

용산 철도역 전철수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이 의사는 일본어가 유창했었습니다.

근대화된 일본을 선망하면서 1925년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그는 꿈을 키우기는커녕

외판원, 가스회사 일용직, 부두 석탄 짐꾼,

스미토모(住友) 출장소 인부, 요리점 점원 등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만 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봉창 의사는 다분히 '친일 성향'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일본 생활에서 큰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힘든 생활도 생활이지만 극심한 ‘조선인 차별’ 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다른 조선인들에 비해 일본말도 유창하고,

또 나름으로는 일본인 행세까지 해가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조선사람’이라는 신분의 벽을 뛰어넘을 순 없었습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취업을 거부당하는 것은 보통이었고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일본인들보다 택없이 적었습니다.

승진 기회는 아예 주어지지도 않았구요.

심지어 그는 ‘천황’의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현장에서 붙잡혀 9일간 무단구금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도일한 지 5년여 만인 1930년 말,

 그는 결국 항일운동에 뛰어들 요량으로 중국행에 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찾아가

거기서 백범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습니다.

 

 

그 후 백범으로부터 일황 암살의 밀명을 띠고 일본으로 건너와 마침내

1932년 1월 8일 연초 육군 관병식을 마치고 황궁으로 귀환하는 일황에게 폭탄을 던졌습니다.

비록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거사를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 해 10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 윤봉길 의사

 

 

일본군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식을 거행한다고 밝히고는

그날 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입장하라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윤 의사가 의거 당일 ‘도시락 폭탄’을 가지고 행사장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었는데,

거사 당일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물통 폭탄'입니다.

(참고로 도시락 폭탄은 거사 후 '자결용'이었습니다)

 

 

 

 

거사에 앞서 윤 의사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두 아들에게 편지 한 장을 남겼습니다.

제목은 위의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큰일'을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윤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즉 '장부는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문구를 남긴 바 있는데,

윤 의사는 끝내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장부다운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 의사는 의거 후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상해에 파견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이송돼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땅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 소식이 세계에 전해지자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안중근 의사 ]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 의사는

이곳 여순감옥으로 이송돼 재판을 받았는데, 이듬해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이곳 사형장에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 때 안 의사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안 의사가 순국한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영웅의 마지막 가는 길에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순국 전날 안 의사는 감옥으로 찾아온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조국이 독립되거든 자신의 유해를 조국으로 옮겨 장례를 치러 달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국이 독립된지 64년, 안 의사가 순국하신지 100주년이 되도록

그 '유언'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못난 후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 의사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그동안 남북한 당국에서 모두 노력을 기울인 적은 있지만

 결론은 ‘별무성과’입니다. 남북한 가운데 먼저 유해 발굴에 나선 곳은 북한측입니다.

북측은 이미 지난 80년대 중반에 전문가 10여 명을 보내 감옥 뒷산 일대를 조사하였습니다

 

남한에서도 몇 해 전에 국가보훈처가 중심이 돼

유해발굴조사단을 구성, 발굴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총 17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발굴단은 물리탐사기, 금속탐지기와 DNA 감식 등

첨단 기술을 동원해 유해 찾기에 나섰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진 못했습니다.

발굴단은 2개월간 6600여㎡를 뒤졌다고 전해지는 데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가 감옥 뒷산을 샅샅이 조사해서 유해를 발굴해 낸다면,

그건 100년 묵은 우리민족의 오랜 한(恨)을 푸는 것이 될 것이요,

 

반대로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감옥 뒷산을 조사하지 않은 채 세월이 더 흘러,

 이 일대가 완전히 건물로 뒤덮여 그 땐 도저히 유해발굴이 불가능해진다면,

우린 100년이 아닌, 천년 만년을 두고도

씻을 수 없는 한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정운현님 글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