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글·책 】

[박범신 칼럼] 지는 봄꽃들에게서 배운다

자운영 추억 2012. 5. 22. 22:06

낙화는 꽃의 죽음이 아니다
변혁 없이 머물러 있는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생은 멀고, 또한 찰나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봄꽃의 낙화를 보라. 길고 혹독한 겨울 동안의 인내를 생각하면 봄꽃들의 황홀한 개화는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정말 찰나에 불과하다. 그리 보면, 낙화가 더욱 속절없고 애달프다. 청춘의 광채도 그러하고 사랑의 열락도 그러하다. 논산시 탑정호의 조정리 마을. 호수 건너편 대명산 숲의 녹음이 어느새 짙푸르다. 꽃의 시신들을 단호하게 밀어내며 가지와 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눅진해지고 있다. 여름 숲을 가리켜 “무섭다”고 한 이상(李箱)의 심사가 환히 짚인다.

아무렴. 낙화는 꽃의 죽음이 아니라, 그 에너지, 잎으로의 전이(轉移)라는 걸 알겠다. 신비하다. 꽃은 떨어져 잎을 견인해내고 잎은 죽어서 마침내 열매를 견인해낸다. 아니 잎은 떨어져 이윽고 제 뿌리로 갈 터이다. 자신의 몸을 썩혀 스스로 근원의 중심을 튼실히 하는 자연의 순환이 경이롭기 한정 없다. ‘에너지 불소멸의 법칙’에 따르면, 심지어 뿌리가 죽어도 그로써 생명에너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에너지는 죽어서도 우주 어딘가에 남아 있으려니, 생물학적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산책길에 나서면 딸기밭이나 고사리밭을 매고 있는 한 떼의 ‘여인네’들을 만난다. 평균연령이 육십대 후반 혹은 칠십대의 ‘할머니’들이다. 농촌에서 이런 단순노동이 ‘할머니’들 차지가 된 게 벌써 한참 전부터이다. 고생고생해 허리가 잔뜩 꼬부라지고 얼굴이 새카만 ‘할머니’들을 상상하는 건 그야말로 오해일 뿐이다. 요즘의 그들은 ‘할머니’가 아니라 ‘여인네’다. 대부분 얼굴빛이 건강하고 표정도 밝아서 후덕하게 늙은 티가 난다. 자주자주 까르르하는 웃음보도 터진다. 도시의 경로당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과 사뭇 느낌이 다르다. 비유하건대, 아침 햇빛을 받으면서 펑퍼짐하게 주저앉아 밭을 매는 그네들의 얼굴엔 도시 사람들이 버리거나 잃은 ‘태양’이 깃들어 있다. 불온한 비유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섹시’하기도 하다. 태양과 함께 건강한 대지의 빛도 그 육체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에선 남자를 달로 보고 여자들은 태양으로 본다. 실제 꾀죄죄하고 덴덕스러운 남자들에 비해 티베트 여자들은 한결같이 환하고 스스럼없고 어연번듯하다. 남자를 태양으로 보는 건 남성중심주의에 따른 불건강한 비유인지도 모른다. 가부장제가 해체되고 절대빈곤의 감옥에서 놓여난 이후, 우리네도 어느덧 티베트의 그 비유가 현실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를테면, 일하면서 사는 지역의 ‘할머니’들은 태양빛이고, 자본주의 욕망에 시시각각 눌리며 사는 도회지의 우리들은 남녀노소 구별 없이 오히려 희끄무레한 달빛으로 비유해야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네들은 아들딸 건강하고 바르게 키워낸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그러므로 사랑의 권세가 위대하다는 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늘 보고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삶의 유한성에 대한 공포감을 넘어선 것이다.

꽃이 아낌없이 지는 건, 죽어서 잎과 열매와 뿌리로 다시 가 근원적 에너지로 환생할 수 있다는 자기신뢰 때문이려니 싶다. 영화로 요즘 화제가 된 바 있는 내 소설 <은교>에서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젊은 너희의 아름다움이 너희의 노력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듯이 늙은이의 주름살도 늙은이의 과오에 의해서 얻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에게 ‘태양’이 깃들어 있다면, 그리하여 습관에 따른 나태함과 매너리즘과 자본주의적 욕망이 주는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지는 꽃이라 해도 죽어가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논산’으로 오면서 가진 첫 번째 소망은 자기변혁에 대한 울울창창한 욕망의 신명나는 발현이다. 지금 지는 꽃이 작년의 그 꽃이 아니며, 지금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물이 어제의 그 강물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꽃이 지는 게 죽음이 아니라, 변혁 없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이 곧 죽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이에 ‘걸맞게’ 살아야 좋다는, 시간의 일반적인 양식(樣式)에 따른 속임수에 넘어가고 싶지 않다.

작가·상명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