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2.26 09:22
"서울 사람들에게 '서울의 술이 있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을 못합니다. 하지만 서울에는 훌륭한 술이 네 가지나 있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가회동 북촌민예관에서 열린 '푸드 아티잔 프로젝트' 주제는 서울의 4대 명주(名酒)였다. 서울시가 지정한 대표 전통주를 만드는 네 명의 장인이 차례로 자신들이 만드는 술을 소개했다.
장인들은 자신의 술과 어울리는 안주를 직접 만들어 가져와 맛보이기도 했다. 향온주 기능 보유자인 서울시 무형문화재 9호 박현숙씨는 "술에는 그 술의 격(格)에 맞는 안주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술문화는 포악하지 않았습니다. 제 어머니는 '술안주는 24계절'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철 재료로 안주를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안주는 너무 맵거나 짜거나 달아도 맞지 않습니다. 은은하니 술맛을 받쳐주는 것, 그것이 안주의 역할이지요." 북촌민예관 070-8834-8401, www.bukchonstudio.com
삼해약주 - 다식
삼해약주(三亥藥酒) 기능 보유자인 권희자씨는 "삼해약주는 고려 때부터 제조한 술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등 많은 문헌에 나올 만큼 유명했다"고 말했다.
찹쌀을 고두밥으로 지어 물과 누룩을 섞어 발효시킨다. 누룩도 보통 전통주와 달리 밀을 그냥 쓰는 것이 아니라, 껍질을 벗기고 빻은 뽀얀 밀가루만 가지고 만든다. 음력 정월 첫 해일(亥日)에 빚기 시작해 한 달 간격으로 돌아오는 해일에 3번에 걸쳐 술을 빚는다 하여 삼해주라 부른다. "추울 때 100일가량 장기 저온 발효해 향과 맛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사대부가에서 마시던 고급 술이었죠. '태평한화(太平閑話)'란 책에는 '이승을 떠나면 삼해주를 맛보지 못할 테니 죽기 싫다'며 떼쓰는 노인이 나오기도 하죠."
삼해약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권씨는 각종 다식을 만들어왔다. "청주인 삼해약주는 담백한 국물과도 어울리지만,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을 가진 다식과도 잘 맞습니다." 다식은 북어포·육포·쌀·흑임자·오미자·달걀노른자 여섯 가지로 만든다. 검은 깨로 만드는 흑임자 다식과 가늘게 찢은 북어포 보푸라기로 만드는 북어포 다식, 잘게 다진 육포로 만드는 육포다식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쌀 다식은 쌀가루로 백설기를 쪄서 다식틀에 찍은 것이고, 오미자 다식은 백설기에 오미자 물을 들여 만듭니다. 노란색 다식은 송홧가루를 쓰는 게 일반적인데, 저희 집안에서는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달걀노른자 다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송절주 - 동아정과
송절주(松節酒)를 담은 잔에서 소나무 특유의 푸르고 신선한 향이 올라왔다. 술맛은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싸래했다. 이성자 송절주장(松節酒匠)은 "송절주는 소나무 마디 삶은 물로 빚는 술"이라고 했다. "멥쌀을 쪄서 잘게 부순 뒤 소나무 마디와 당귀 삶은 물을 섞어 밑술을 담가요. 누룩은 통밀을 거칠게 빻은 후 이중 고운 가루와 껍질을 제거한 다음 만듭니다. 술이 완전히 익으면 용수(술 거르는 도구)를 박아 맑은 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술을 병에 담아 냉장고에 두면 막걸리가 차츰 가라앉고 청주는 위에 뜨는데, 이 청주를 계속 따라내 따로 담습니다. 이걸 냉장고에 6개월 숙성시켰을 때 참 맛있더라고요."
이씨는 송절주와 함께 동아정과(正果)를 냈다. 동과(冬瓜)라고도 하는 동아는 박과의 식물로 무등산수박처럼 길쭉한 타원형에 줄무늬가 없이 초록색이다. 수박처럼 사각사각하지만 단맛이 없는 것이 오이와 비슷하다. "동아정과는 재료인 동아 구하기도 어렵지만 만들기도 힘들어요. 대부분의 정과는 과일 등을 꿀이나 설탕 따위에 그냥 졸여서 만드는데, 동아정과는 달라요. 동아를 '사화가루'라고 하는 꼬막 껍데기를 태워서 빻은 가루에 묻혀 사흘 재웠다가 깨끗이 씻어서 엿기름에 졸여야 해요. 사화가루에 삭히지 않으면 동아 특유의 사각사각한 맛이 나지 않고, 일반 정과처럼 찐득하거든요. 이번에 동아정과 만들 때는 사화가루를 살 수 없어서 꼬막을 사다가 직접 불에 구워서 빻아 썼습니다."
향온주 - 양동구리·배추전
완자 모양으로 지져낸 양동구리
박현숙 향온주장은 "향온주는 고려시대 궁중에서 임금이 마시던 술"이라고 했다. 멥쌀과 찹쌀로 빚은 청주로,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어사주로도 쓰였다. 밀 누룩을 쓰기도 하지만, 정통 향온주는 녹두누룩으로 담근다는 점이 전통주 중에서도 독특하다.
"녹두는 누룩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아요. 단백질 함량이 높아서 물이 닿으면 발효되지 않고 썩은 경우가 허다해요. 하지만 입에서 촉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드럽고 향기가 대단히 좋지요." 발효가 끝난 밑술에 현미 찹쌀로 고두밥을 지어 누룩과 물을 넣어 덧술을 만들고, 여러 번의 덧술 과정이 끝나면 걸러서 소줏고리에 증류한 다음 6개월 숙성시킨다.
박씨는 향온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양동구리와 배추전을 들고 왔다. 양동구리는 양(소의 첫 번째 위)을 잘게 다져 완자 모양으로 빚어 달걀옷을 입혀 지져낸 전이다.
배추전은 무채를 넣고 돌돌 말아서 부쳤다. "겨울에 소를 많이 잡았잖아요. 배추도 가장 맛있을 때고요."
삼해소주 - 육포·깨보숭이
삼해소주(三亥燒酒)는 삼해약주를 증류해 얻는 소주다. 순수한 향미가 특징으로 궁에서 행사나 의식 때 사용됐다. 어머니인 이동복 삼해소주장의 뒤를 이은 김택상씨는 "좋은 술, 맛있는 술, 건강을 유지하는 술, 세계적 명주로 만들겠다"고 했다.
삼해소주에 곁들일 안주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13호인 김은영 매듭장이 준비했다. 김은영씨는 간송미술관을 설립한 간송 전형필 선생의 맏며느리이자 김광균 시인의 딸이기도 하다. "육포는 잣과 같이 드셔야 맛과 향이 더 살아납니다. 호두는 물에 불려서 쓴맛이 나는 속껍질을 제거한 다음 튀겼어요. 깨보숭이는 들깨 꽃봉오리가 파랄 때 따서 잘 말렸다가 찹쌀풀을 묻혀 튀깁니다. 서울식 김부각은 간장을 안 써서 김 자체의 맛을 가능한 살리는 게 특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