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니든 세계 식물원총회 참가기
구경하고 쉬는 곳 넘어 미래 유전자원 보전하는 '살아있는 박물관'
기후변화와 식량위기 대응, 개도국 돕는 '빵나무 프로젝트' 눈길
» 지난해 영국 에딘버러 식물원에서 분양받은 금강인가목이 올해 국립수목원에서 꽃을 피웠다. 세계에서 금강산에만 있는 한반도 특산종이다. 사진=국립수목원
■ 30년만에 꽃핀 수수께끼 중국목련
금강산의 바위 곁에 자라는 키작은 나무인 금강인가목은 세계에서 금강산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이다. 미국인 식물채집가 윌슨은 1917년 이 나무를 미국 하버드대 아놀드 수목원에 가져간 뒤 1924년 영국 에딘버러 식물원에 분양했다. 이후 미국 개체는 죽었다. 지난해 국립수목원은 에딘버러 식물원에서 씨앗을 받아 기른 금강인가목 묘목을 들여와 올해 꽃을 피우는데 성공했다.
한반도 특산식물인 구상나무는 세계 162개 수목원에서 재배하고 있지만 금강인가목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북한을 빼고는 에딘버러 식물원이 유일하다. 데이비드 라에 에딘버러 식물원 원예 및 학습 책임자는 “흰꽃이 피는 평범한 관목이지만 식물원 구석에서 반세기 넘게 기른 까닭은 북한 자생지가 사라졌을 것을 대비한 안전판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중국 윈난성 쿤밍 식물원에 경사가 났다.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중국목련이 처음으로 개화했기 때문이다. 윈난성의 자생지에 77개체만 확인된 높이 30m의 이 대형 목련의 씨앗을 받아 30년 동안 기른 성과였다. 웨이방 순 쿤밍 식물원장은 “저녁에 2~3시간만 꽃이 피는 등 수수께끼의 나무이지만, 분명한 것은 식물원의 수집과 증식, 복원을 통해 멸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예 멸종한 식물을 되살리기도 한다. 거대 석상으로 유명한 태평양 이스터 섬에만 살던 나무 토로미로는 벌채와 목축으로 화산 분화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그루가 1962년 땔감으로 도채돼 사라졌다. 칠레 식물원은 주민이 받아놓은 씨앗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 섬의 문화를 살리는 차원에서 복원사업을 벌이고 있다.
■ “기록이 없으면 식물원 아니다”
» 지난달 20~25일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열린 제5차 세계 식물원 총회 전체회의 모습.
제5차 세계 식물원 총회가 지난달 20~25일 뉴질랜드 더니든에서 한국 등 45개국 300여 식물·식물원 전문가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세계식물원보전연맹(BGCI) 주관으로 3년마다 열리는 이 총회는 식물 보존에 관한 가장 큰 규모의 모임으로, 내년 9월 강원도 평창에서 열리는 유엔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총회를 앞두고 식물 보전에 관한 구체적 전략을 가다듬는 자리였다.
식물은 우리에게 식량, 의약품, 목재, 맑은 물, 홍수 통제, 토양 보전, 문화적·영성적 가치 등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준다. 그러나 세계 식물 종의 20%가 멸종위기에 놓여 있으며,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상당수 개도국은 제 땅에 어떤 식물이 자라는지조차 모르는 형편이다.
식물원은 세계에서 알려진 고등식물 38만종의 3분의 1을 기르고 있어 가장 이상적인 식물 보전 기관으로 꼽인다. 2010년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에서 확정한 ‘식물 보전을 위한 세계 전략’(GSPC)은 멸종위기 식물의 적어도 75%는 자생지에서 보전하고, 75% 이상을 가능하면 그 나라 식물원에서 보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 야생에는 200그루밖에 없는 뉴질랜드 특산식물 카카부리. 식물원에서 증식돼 복원되고 있다. 꽃 모양이 이 나라 특산 새인 카카의 부리를 닮았다.
최근 식물원의 보전 기능이 강조되면서 ‘기록’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요아힘 그라츠펠트 세계식물원보전연맹 지역사업국장은 “식물원이 공원과 다른 점은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근거자료가 없다면 할 이야기도 자료 가치도 없어진다. 식물원은 살아있는 박물관인 셈”이라고 말했다.
잘 관리되는 식물원에선 식물이 들어와서 번식해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뒤에도 기록이 사람의 출생기록처럼 남는다. 많은 전문가들이 ‘기록이 없으면 식물원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마크 리처드슨 오스트레일리아 식물원 컨설턴트는 “기록된 식물자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그것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알 수 있다. 한 번 사라진 식물의 유전자원을 사람이 만들 방법은 없다”라고 말했다.
» 식물원에서 식물 다음으로 중요한 건 기록이다. 오클랜드 식물원 양묘장에서 기르는 묘목마다 출처와 용도 등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 담장을 넘어서
약 1만년 전 농작물과 약초 재배원으로 시작된 식물원은 17세기 이후 서구 열강이 식민지에서 가져온 고무·커피·차·향신료 등의 열대식물원을 거쳐 현재 보전을 위한 과학연구와 전시, 교육의 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식물원은 지난 30년 동안 4배로 늘어 현재 세계에는 3200개의 식물원이 있으며 연간 약 2억명이 들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식물원이 활성화한 것은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여가와 자연에 대한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
» 설립한 지 150년 된 뉴질랜드 더니든 식물원 전경. 식물원은 도시민에게 중요한 휴식처이다. 사진의 나무는 캘리포니아 원산인 라디에타 소나무로 뉴질랜드에선 원산지에서보다 빨리 크게 자란다.
이번 총회에서는 식물원이 단지 구경이나 휴식 장소를 넘어 미래 유전자원을 간직하는 핵심 시설이라는 점에서 이용과 기능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지 활발히 논의됐다. 또 식량위기와 기후변화 같은 새로운 세계적 과제에 식물원이 어떻게 대응할지, 개도국의 식물 보전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지도 관심사였다. 실제로 아프리카 20개국과 중동의 6개국은 생물다양성은 높지만 식물원은 전혀 없다.
동아프리카 열대 고산지대는 생물다양성의 세계적 보고이지만 차·커피 농장과 외래식물 때문에 심각하게 훼손됐다. 차를 말리기 위한 땔감용으로 호주산 유칼립투스를 심는 바람에 자생식물이 자취를 감췄다. 케냐 브라켄허스트 식물원은 세계식물원보전연맹의 지원을 받아 동아프리카 고유숲 복원에 나서 홍수피해 절감 등 부수효과도 얻고 있다.
미국 국립 열대 식물원이 태평양 34개 섬에서 확보한 120개 빵나무 품종을 보급해 세계적 기아의 대안으로 내놓은 ‘빵나무 프로젝트’가 이번 총회에서 눈길을 끌었다. 빵나무는 1만 5000년 전부터 태평양 섬 주민이 주식으로 썼던 식물로 영양분이 풍부한데다 잘 자라 널리 이용됐지만 토종 품종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세계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10억 명이 있다. 이들이 사는 곳을 세계 지도에 그리면 빵나무 분포지와 대략 일치한다. 빵나무 프로젝트가 유망한 이유이다. 빵나무는 증식이 까다로운데 이 식물원은 세포 증식 등 신기술을 개발해 아프리카와 중남미 23개국에 보급하고 있다. 아이티에서는 빵나무 여램로 만든 가루로 학교 급식, 식품, 맥주와 화장품 원료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치퍼 위치먼 국립 열대 식물원장은 말했다.
» 태평양 원주민의 주요 식량작물이었던 빵나무. 한때 노예의 주요 식량이다가 최근에 기아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엠크웨크,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선진국에선 도시 주민을 향해 담장을 여는 식물원이 늘고 있다. 에딘버러 식물원은 방문객이 대부분 여유 있는 중산층이어서, 젊은 실업자와 노숙인 등은 ‘우리 같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다’거나 ‘가면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외면하는 현실에 착안했다. 식물원은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과 노숙인 등이 매주 식물원의 자기 밭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요리해 먹는 다섯 달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해 호평을 얻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더보 식물원은 교통사고 환자의 재활이나 우울증·비만·당뇨 환자의 치료를 위한 정원을 운영하고 있고, 타즈메이니아 식물원은 지역 주민에게 공동체 텃밭을 제공하고 경작 시범과 학습 기회를 제공하는 ‘식량 식물원’을 조성하고 있다.
» 오클랜드 식물원의 채소 정원. 자원봉사자들이 관리하며 직접 재배해 먹기도 한다.
새라 올드필드 세계식물보전연맹 사무총장은 “식물 보전은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가 됐고 그 핵심에 식물원이 있다. 멸종위기 식물에 대한 정보 부족, 소통과 참여, 경제 위축에 따른 투자 부족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더니든(뉴질랜드)/ 글·사진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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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자원 보전 앞장서는 중국
신장에 세계 최대 식물원 만든다
» 중국 신장 투루판 일리 계곡의 야생 사과 자생지 모습. 중국은 이곳에 세계 최대 식물원을 세워 중앙아시아 건조지대의 식물 보전에 나설 계획이다. 사진=컬처럴 차이나 닷 컴
중국은 광둥성에 세계식물원보전연맹(BGCI) 지역 사무소를 유치하고 2008년 범정부 차원의 식물보전 전략을 마련하는 등 식물 보전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 이번 식물원 총회에도 중국은 주최국 뉴질랜드에 이어 가장 많은 21명이 참가했다.
중국이 식물에 관심이 높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대부터 아열대, 사막까지 다양하고 넓은 국토에는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3만 3000종의 식물이 분포한다. 이는 세계 식물종의 8%에 해당하며, 북미의 2만종, 유럽 전체의 1만 2500종보다 훨씬 많다.
게다가 전체 식물종의 절반인 1만 7700종은 세계에서 중국에만 자생하는 특산종이고 그 가운데 5400종은 오로지 한 곳에만 산다. 식물 유전자원이 풍부하고 또 매우 취약한 상태다.
중국은 식물원 분야에서 유럽과 미국 등과 활발한 국제협력을 벌여 왔지만, 경제 침체로 서구 국가들이 주춤하는 동안에도 이 분야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 중국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식물종을 다량 보유하고 있다. 중국 원산인 목련의 일종(마그놀리아 윌소니이). 사진=웬디 커틀러,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번 총회에서 카이윈 관 중국 과학아카데미 교수는 중앙아시아 신장 투루판에 여의도 면적의 12배인 세계 최대 규모의 일리 식물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혀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중앙아시아는 영하 50도와 영상 50도를 넘나드는 큰 기온차와 고산, 사막, 초지, 습지, 초원 등 생태계가 다양해 식물만 8736종이 분포한다. 식물원이 들어설 신장에만 4081종이 있으며, 그 가운데는 대규모 야생사과 자생지를 포함해 103종의 야생 과일 자생지가 포함돼 있다.
또 중앙아시아에는 2000종 이상의 약용식물과 곡물 근연종 87종이 분포해 추위와 가뭄에 잘 견디는 식물과 함께 식물 유전자원 가치가 매우 높다. 카이윈 관 교수는 “중앙아시아의 식물 가운데 약 10%가 멸종위기에 놓여 있어 시급한 보전대책이 필요하다. 앞으로 20~30년에 걸쳐 식물원을 확충해 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 첸 중국 과학아카데미 박사는 “자연상태에서 식물이 기후변화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높은 곳에 보전을 위한 식물원을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은 또 캄보디아 최초의 식물원인 국립수목원 건설에 1050만 달러를 지원하는 등 개도국의 식물 보전 지원에도 나서고 있다.
» 국립수목원은 세계식물원보전연맹과 함께 이번 총회의 식전 행사로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 9개 국가 식물원 관계자 10명을 초청해 ‘아시아지역 식물원 교육과정’을 열었다.
김용식 한국식물원수목원협회장(영남대 교수)은 “중국의 식물원은 2000년대 이후 정부의 집중 지원과 인력 확보로 세계 수준에 도달했다. 우리나라에도 식물원은 70개에 이르지만 식물종의 이력관리 등 핵심적인 요건을 갖춘 곳은 천리포수목원과 국립수목원 등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국제 수준에 많이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국립수목원은 이번 총회의 식전 행사로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 9개 국가 식물원 관계자 10명을 초청해 ‘아시아지역 식물원 교육과정’을 열어 눈길을 끌었다. 신준환 국립식물원장은 “국제 현안인 생물다양성 분야에서 아시아 지역의 협력관계를 다지는데 우리나라가 앞장서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더니든(뉴질랜드)/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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