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색·글·책 】

딸과 함께한 숲속 만찬

자운영 추억 2013. 8. 25. 07:58

 

과 함께한 숲속의 크리스마스 만찬
[플루티스트 용서해 셰프의 요리 산책 - 3]

2013.08.16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용서해 | editor@catholicnews.co.kr


아침에 일어나 나가보니 개울물 전체가 꽁꽁 얼어 있어서 먹을 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옛날엔 얼음이나 눈을 녹여 식수로 썼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요즘엔 하늘에서 내리는 눈조차 먼지와 공해 물질로 가득하니 눈을 녹여서 먹을 수도 없고요.

그러나 아직 겪지 않은 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기로 합니다. 불안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두껍게 언 개울 여기저기를 돌로 두드리며 살펴봅니다. 그러다 문득 두꺼운 얼음장 밑으로 물줄기가 약하지만 졸졸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리 걱정부터 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웅덩이를 만들어두면 물이 고일 것 같아 얼음을 깨고 바닥의 모래를 퍼낸 뒤 작은 돌들로 조그만 축대를 쌓았습니다. 작지만 제법 그럴듯한 우물이 만들어졌습니다. 한참 후 다시 가보니 맑은 개울물이 고여 있고, 어디선가 가재도 한 마리 기어 나와 모래로 집을 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을 퍼 온 뒤 다시 가보면 웅덩이가 바로 얼어 있습니다. 물을 길을 때마다 돌로 얼음을 깨야 하고, 양동이에 담아온 물은 침전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써야 하긴 했지만, 적어도 식수 문제는 해결이 된 셈입니다. 자연을 믿고 살아갈 때 어떻게든 자연은 그 안에서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지혜를 일러준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배운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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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스승이란 걸 나는 산속에 들어와 자주 깨닫습니다. 동트기 직전 달빛도 별빛도 기운 때가 하루 중 가장 어두운 때라는 것을 저는 이 깊은 산속에 들어와서 알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 갇힌 듯한 때가 있지만, 이내 떠오르는 아침의 밝은 태양을 바라보니 어둠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연은 인생의 정답을 일러줍니다. 자연스런 순리에 맞서려 하지 않고 거기에 나를 맡기는 순간 그 답은 밤하늘의 별처럼 이미 그곳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보아주기만을 기다리면서요.

방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는데 커다란 들메나무가 바람에 휘청거리기 시작하고, 오두막에 미처 들이지 못한 살림살이와 땔감을 임시로 덮어놓은 천막이 반쯤 벗겨져 휘날리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산 속의 겨울이 실감나는 순간입니다. 큰 눈이 온다는 대설이 오늘인가 싶어 농지 달력을 짚어봅니다. 그런데 도대체 오늘이 며칠인지가 헛갈립니다. 만날 이도 없고 약속할 일도 없으니 도시에서처럼 굳이 하루하루 날짜를 셀 필요가 없고, 그러다 보니 날짜에 연연해할 일도 없게 됩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날짜를 보고 알기보다 몸의 감각으로 알아갑니다.

저는 속으로 ‘대설 바람이 첫 인사 하러 왔으니 마중해야겠지?’ 하며 옷깃을 여미고 밖으로 나갑니다. 대설 추위가 정말, 서서히가 아니라, 한순간에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뭔가에 단단히 심술이 난 듯 불어대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땔감을 덮은 천막을 잡도리하고 눈 쌓인 밭도 한 바퀴 돌아봅니다. 이제 산에 있는 모든 생물은 겨울을 지내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바람 소리만 빼면 숲에는 깊은 고요가 깃들고, 나도 바삐 움직이던 일손을 놓고 긴 겨울잠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밤새 불어대는 바람 소리에 뒤척이다가 일찍 일어난 김에 촛불을 켜고 아직 못 다한 짐정리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꾸역꾸역 담아온 악보며 책, 미술 도구, 그릇, 바느질 도구……. 언젠가 필요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 다는 아닐 것입니다. 개구리가 수백만 개의 알을 낳지만 그 중에서 올챙이가 되는 것은 불과 몇 십 마리이고 그 가운데서도 개구리로 자라는 것은 겨우 몇 마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요. 자연은 그렇게 많은 것을 버리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또 진화한다고 합니다.

내가 버려야 할 것은 비단 저 꾸러미 속에 담겨 있는 짐들만은 아닐 것입니다. 내 안에 가득한 묵은 생각들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생각을 맞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럴 때 몸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온전히 자연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숲속에서 배우는 ‘엄마’의 길

언제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연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아직 어수룩하기만 하지만 이런 나를 자연은 그냥 있는 그대로 품어줍니다. 그런 자연이 마치 엄마의 품과도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 모습이 어떻든 엄마는 그저 품고 사랑해 줄 뿐이죠. 그러니 아직 부족해도, 실수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치유 음식을 연구하겠다고, 오염되지 않은 깊은 산속에 들어와 오두막을 짓고 살면서 나는 먼저 그런 엄마의 길을 배웁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멀리 외국에서 수의학을 공부하는 딸이 찾아왔습니다. 1년 만에 보는 딸아이입니다. 아이는 찬바람에도 얼굴이 트지 않게 해주는 거라며 식물에서 추출한 오일을 빨간 통에 담아와 내밉니다. 선물 고르기가 힘들었다며 은근슬쩍 공치레하는 딸아이가 그저 예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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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딸아이를 키우면서 저는 늘 학교 공부에는 50퍼센트의 힘만 쓰라고 이르곤 했습니다. 나머지 50퍼센트의 힘은 다른 것들, 예컨대 책을 읽는다든지 악기를 연주한다든지 영화를 본다든지 친구를 사귄다든지 하는 것에 쓰라고 했어요. 그래야 인생이 풍요로워진다고 말이에요. 그래서인지 딸아이는 늘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시험을 치렀지만 마음은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성장하면서 지금 딸아이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설령 실수를 하거나 좌절을 겪는다 해도 결국은 그런 것들까지도 자기 삶의 양분으로 삼아갈 거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 딸아이가 올 때를 기다리며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호박소스 삼겹살 찜입니다. 가을에 수확한 늙은 호박과 생강, 봄에 채취했다가 말려둔 야생 민들레를 가마솥에 넣어 종일 곤 뒤에 베보자기로 건더기를 걸러내고 만든 국물은 속을 따듯하고 편안하게 해줘 그냥 음료로만 먹어도 좋습니다. 긴 시간 가마솥에 불을 지피면서 딸아이가 ‘자식의 건강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알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야”라고 하시던 친정엄마의 말씀이 떠오르기도 했어요. 내리사랑이란 다른 말로 하면 내 몸을 통해 나온 자식에 대한 엄마의 짝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일 테지요. 마치 자연이 자신의 품에서 나온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처럼요.

오두막에 딸린 저의 부엌에는 마트에서 파는 음식 재료는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늙은 호박을 고아 만든 음료는 간혹 소스로 사용하기도 해요. 온통 하얀 숲속의 크리스마스 저녁을 위해 저는 이 음료를 소스로 이용해 삼겹살 찜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식사 후 후식을 먹어야 깔끔한 마무리가 된다는 딸을 위해서 별도로 디저트도 준비했고요. 그럼, 딸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요리, 호박소스 삼겹살 찜을 같이 한번 만들어볼까요?

풀리지 않는 짝사랑의 수수께끼 레시피 : 호박소스 삼겹살 찜

호박소스 삼겹살 찜의 레시피를 재미있게 한 편의 사랑 노래로 만들어보았어요. 먼저 그것을 한번 들어보실래요?

너의 마음이 참 따뜻하구나! 그래서 노란 빛깔을 담고 있는 거니?
예부터 어미의 그 어미의 손길이 담긴 마음은 이 땅에 흰 민들레꽃으로 피어났단다.
때로는 맵고 아린 맛에 서로가 소침해져도 뒤돌아서면 그 맛이 그리워졌던 것일까?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던 약속 하나에
붉은 대추 열매 한 줌은 사랑의 열매가 되어
“불에 소금 치듯 하리라”던 그 지옥불일지라도
17도의 투명 이슬로 불같은 열기를 피워낸 어미의 그 어미의 몸은
결국 깊은 냄비 속에서 뭉그러지게 익어간단다.

수수께끼 레시피의 재료들이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바로 호박소스에 들어갈 단호박(노란 빛깔이라고 한 것), 흰 민들레, 생강(맵고 아린 맛이라고 한 것), 그리고 삼겹살 찜에 들어갈 단호박, 대파, 대추 한 줌, 돼지고기 삼겹살, 조리용 화이트 와인(17도 투명 이슬이라고 한 것)이 그 답입니다. “불에 소금 치듯 하리라”는 말은 뜨거운 숯불에 소금을 뿌릴 때의 모습을 성경 구절을 인용해 표현한 것이고요.

먼저 삼겹살(돼지안심도 좋습니다)에 소금과 후추 간을 미리 해둡니다. 코팅 팬을 불에 달군 뒤, 육즙이 빠지지 않도록 고기의 앞뒤 면을 돌려가며 겉만 바삭하게 굽습니다. 그 사이 찜을 할 깊은 냄비를 미리 뜨겁게 예열해 둡니다. 고기 겉면이 다 구워지면 큼직하게 썰어서 찜 냄비로 옮겨 담습니다. 이제 조리용 화이트 와인(혹은 청주)을 달궈진 팬에 부어 알코올을 날린 다음 고기에 부어요. 그러면 고기에서 나온 육즙과 와인의 향과 맛이 어우러져 아주 훌륭한 소스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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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박소스 삼겹살 찜 ⓒ용서해



찜 냄비에 단호박 적당량과 대파 한 뿌리 정도를 한 입 크기로 썰고 넣고 대추도 한 줌 넣습니다.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늙은 호박 음료를 재료들이 잠길 정도로 붓습니다. 이제 수수께끼의 재료가 다 들어갔네요! 고기에서 육즙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센 불로 소스를 졸이고 재료가 익는 정도를 확인하면서 중불에서 나머지 소스를 은근하게 졸이면 호박소스 삼겹살 찜이 완성됩니다. 보통 찜 요리에 넣는 설탕과 그 밖의 갖은 양념은 필요 없어요. 단호박과 대추에서 나온 자연스런 단맛과 민들레의 쌉싸름한 맛, 대파 뿌리와 생강에서 나오는 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그보다 훨씬 훌륭한 맛을 내니까요.

삼겹살 찜만으로도 식사는 충분하지만, 후식을 원하는 딸을 위해 여기에 간단한 요리 몇 가지를 덧붙여보았습니다. 올미가루에 산머루 효소를 섞어 약불에서 걸쭉하게 익힌 뒤 식혀서 젤리처럼 되면 그 위에 산딸기 잼이나 ‘수수 그리시니’(수수가루에 끓인 소금물과 기름을 넣고 반죽한 뒤 꽈배기 모양으로 만들어 팬에 올린 다음 치즈가루와 고춧가루를 뿌려서 구워낸 것)를 올린 ‘올미가루 야생 산머루 젤리’, 그리시니와 똑같은 레시피로 만들어 팬에 구워낸 ‘수수빵’, 양조 식초를 이용해서 만든 ‘리코타 치즈’에 언 마늘의 껍질을 벗겨 조청에 담가 만든 ‘마늘정과’ 으깬 것을 섞은 뒤 그것을 곶감 속에 채워서 썰어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봄에 만들어놓은 산딸기 잼으로 장식을 하고요.

이제 오랜 만에 해후한 딸과의 크리스마스 만찬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접시에 담긴 요리들에는 봄부터 가을까지 자연이 아무 조건 없이 내어준 결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의 손을 거쳐 자연이라는 더 큰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엄마와 딸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빠질 수 없는 마지막 한 가지, 여자들끼리의 수다가 밤새 이어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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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늘정과, 리코타 치즈로 속을 채운 곶감 ⓒ용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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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빵과 수수 그리시니 ⓒ용서해

용서해
교향악단에서 24년간 활동한 플루티스트. 호스피스 센터에서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한 음악 봉사를 했고, 이들이 먹는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호스피스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요리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환자와 가족들을 초대해 함께 음식을 먹고 이야기 나누며 삶의 마지막 순간을 용서와 화해, 평화 속에 보낼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이야기를 담은 저서로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 2012)가 있다.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