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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Solea Canon (캐논과 지그 D장조) - Gustavo Montesano

자운영 추억 2013. 8. 16. 11:39

Solea Canon - Gustavo Montesano

Flamenco Fantasy (8 Jul 2002)

Peter Tchaikovsky 1840-1893

No.03 - Canon and Gigue in D

              (캐논과 지그 D 장조)

 

Canon and Gigue in D 

Composed by Johann Pachelbel (1653-1706)
Orchestra :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ed by Carlos Gómez

플라멩고 기타와 클래식의 유명 선율이 결합된 새로운 크로스오버! 주목받는 아르헨티나의 젊은 기타리스트 몬테사노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화려한 음악의 향연.

전곡 듣기

 

Gustavo Montesano (구스타보 몬테사노)


아르헨티나의 플라멩코 기타리스트.

플라멩코 기타 연주 및 편곡에 있어 쿠스타보 몬테사노는 플라멩코 리듬을 기본으로 다양한 라틴 리듬을 이용해 클래식 음악과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1955년 10월 14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태생의 플라멩고 기타리스트인 구스타보 몬테사노가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카를로스 고메즈와 가진 협연이다.

이 아이디어는 조르지 알바레즈라는 사람에 의해 기획되고 만들어졌는데 클래식 크로스오버 음반 가운데 제일 먼저 녹음된 플라멩고와의 협연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플라멩고 기타 연주 및 편곡에 있어 쿠스타보 몬테사노는 플라멩고 리듬을 기본으로 다양한 라틴 리듬을 이용해 클래식 음악과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구스타보 몬테사노'는 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과 그 작업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1996년 6월, 마드리드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조르지 엘베레즈는 내게 새롭고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유명한 클래식 음악들을 플라멩고 앙상블(기타, 박스, 손벽치기)과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한다는 것이었다. 조지는 내게 데모 테이프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은 개인적으로 전율을 느끼는 도전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멘델스존과 모짜르트, 베토벤, 알비노니, 슈베르트, 파헬벨, 바흐, 비발디. 우리는 그후 6개월 동안 작업을 계속했다. 우리는 정말 만족스러울 때까지 필요한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정작 녹음할 즈음 우리는 이 프로젝트에 또 다시 1년이라는 시간을 들인 후에야 정말로 만족할 수 있었다. 새로운 퓨전이 탄생한 것이다."

01 - Tango Adagio (Tomaso Giovanni Albinoni-Adagio )

 

02 - Moonlight Rumba (Beethoven - Moonlight Sonata)

 

03 - Solea Canon (Johann Pahelbel - Canon)

 

04 - Rumba Allegro (Mozart - Symphony No 40)

 

05 - Tango Aria (Bach - Air On G String)

 

06 - Tango Serenata (Schubert - Serenade)

 

07 - Buleria Adagio (Mozart - Piano Concerto No 21)

 

08 - Andante Rumba (Mendelssohn - Symphony No 5)

 

09 - Fandango For Elise (Beethoven - Für Ellise)

 

10 - Flamenco Bolero (Ravel - Bolero)

 

11 - Primavera Tango (Vivaldi - The Four Seasons)

 

“탱고는 시인들이 언어로 기술하고자 하는 것들,

그리고 투쟁은 곧 축제라는 믿음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플라맹고 무도장 Fernando Botero (1932~ ) 콜롬비아의 화가, 조각가

 

 

탱고의 생성 과정

탱고의 어원은 ‘만지다’는 뜻의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비롯되었다. 탱고는 19세기 유럽의 댄스와 댄스 음악이 아르헨티나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이 혼용된 복합적인 음악 산물이다. 탱고의 문화적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라틴 아메리카·아프리카의 유기적인 결합은 19세기 아르헨티나의 복합적 문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남부 유럽의 고전적인 춤곡과 아프리칸 이주민들의 민속음악이 결합된 탱고 음악은 모체, 또는 원조로 쿠바 아프리칸 노예들의 음악 하바네라(Habanera)를 모시고 있다. 하바네라는 19세기 초 쿠바에서 유행한 2/4박자의 춤곡으로, 아바나에서 이 우아한 춤곡을 접한 아르헨티나의 선인들에 의해 19세기 중엽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건너왔다. 쿠바의 하바네라는 아르헨티아에서 더 강한 템포감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가우초의 멜로디가 차용된 ‘밀롱가’(Milonga)―현재 탱고의 변형된 형식이나 댄스 홀을 지칭한다―라는 고유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1860∼70년에 즈음하여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확산된 밀롱가는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로 진화하고, 이는 탱고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음악이 되었다. 그 밖에 유럽의 폴카와 중남미의 격렬한 축제 음악 살사와 볼레로에서도 그 내용을 흡수하게 된다. 탱고 음악에 함유된 복잡하고 다양한 다문화적 배경은 탱고 음악이 오늘날 인종과 민족에 구애받지 않고, 월드뮤직으로서 폭넓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요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탱고의 산지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항구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보카 지역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된 것은 1880년대이며, 1930년대까지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져, 짧은 시간에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는 유럽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이주민들로 가득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열기가 가득한 이국적인 ‘남미의 파리’의 거주자 중 75% 이상이 유럽에서 이주해온 이민자들이거나 그들의 자손들이었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동남쪽에 있는 지저분한 항구인 보카에는 부두와 신생 공업 지대가 인접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에서 이주해온 극빈층 이주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이 가난한 서민의 도시에는 유럽의 생활 양식 그대로인 카바레와 음악이 흐르는 선술집과 레스토랑이 보헤미안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고 있었다. 거친 항만 노동자와 도축업자, 밀수꾼과 거리의 여인들이 뒤엉킨 이 도시의 풍경에는 생활에 찌든 노동자의 권태와 고독감이 가득하였다.

이렇게 하층민의 가난한 삶과 체념적인 인생관은 라틴 음악의 격정과 융화되어 탱고 음악의 정서와 내용이 되었다. 흥청대는 밤거리와 어둡고 습기 가득한 보카의 일상은 2/4박자의 강렬한 리듬감과 악센트를 자아내며, 강한 호소력으로 그들의 삶과 영혼을 지배했다. 보카의 빈민굴에서 발생한 탱고는 처음에는 항구에서 기생하는 도박사·밀수꾼 등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만 그 명맥을 유지했으므로 ‘포르테냐 음악’(Musica Portena)이라고도 불렸다.   

 

초기 탱고 음악의 발전

최초의 탱고 곡은 1880년대에 발표된 ‘Bartolo’로 기록되고 있으며, ‘El Choclo’의 작곡자인 앙헬 비요르도가 기타와 하모니카를 동시에 연주하며 장난스럽게 불렀던 노래가 탱고 음악의 원형이었다. 초창기의 탱고는 플루트·클라리넷·기타·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1910년 무렵 ‘El Amancer’의 작곡자인 로베르토 피르포가 처음으로 독일에서 수입해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를 사용하면서, 반도네온은 탱고를 특성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은 강력한 스타카토·레가토 주법으로 아르헨티나 탱고의 독특한 리듬감을 재현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도구였다. 1910년대 오스발도 푸글리에세에 의해 제안된 탱고의 기본적인 편성은 ‘오르케스타 티피카’라는 고유한 명칭의 반도네온 2대, 바이올린 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로 구성된 6중주 편성으로 확립되었다. 때로 오르케스타 티피카를 축소한 반도네온 1∼2대, 바이올린 1∼2대, 피아노 1대, 베이스 1대의 편성인 ‘콘훈토’는 더 밀도 높은 연주에 사용되기도 했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탱고 음악의 첫 번째 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수려한 외모와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작곡 능력을 보유한 그는 여러 방면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탱고 스타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19세기 말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유럽과 남미의 이질성과 동질성을 결합하며 탱고 음악의 특성을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그는 자신이 주연했던 영화에서 13세 소년,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발탁하기도 했다. 가르델은 193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수백 곡의 히트곡을 남겼다. 초기에는 주로 왈츠나 쿠에카·가우초 등의 아르헨티나 민속음악을 연주하다가, 1917년 최초의 탱고 히트곡 ‘Mi Noche Triste’를 발표하면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는다. ‘Mi Buenos Aires Querido’는 그의 이름을 오늘에까지 지속시켜주었던 초기 탱고 음악의 명곡들이었다.

가르델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그가 뿌린 씨앗들은 하나둘 열매를 맺기 시작한다. 가르델과 함께 ‘현대 탱고의 시조’라 불렸던 훌리오 데 카로를 비롯해서 로베르토 필포·프란시스코 카나로·오스발도 프레세도·후안 필리베르토 등이 포스트 카를로스 가르델 시대의 주역으로 초기 탱고의 발전을 진두 지휘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감상의 차원이 아니라 탱고의 또 다른 의미인 무용을 위한 목적을 특화시켰다. 이때부터 탱고 음악은 춤곡의 성격을 전면적으로 띠기 시작했으며, 탱고 음악을 위한 대규모 밴드가 조직되었다. 후안 데 아리엔조와 아니발 트로일로는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정식 오케스트라 버전의 곡을 생산했다.

탱고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1930년대는 탱고의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혼란의 시간이었다. 1930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부가 아르헨티나를 점령하면서 탱고 음악은 심각한 위기를 맞는다. 3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자유로운 의사 표현과 문화를 향유할 수 없었던 폭정 시대에 탱고 음악은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탱고가 연주되고, 탱고 춤이 함께 흐르던 클럽과 댄스 홀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탱고 작곡가와 뮤지션들이 블랙 리스트에 오르며, 창작의 날개를 꺾어야만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시민들이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면서 탱고는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탱고 음악은 ‘아르헨티나 서민들의 자유를 위한 찬가’라는 의미가 보태졌다. 가난한 빈민층의 음악이었던 탱고는 지식인과 상류층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더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이미지로 변모되어 갔다. 1946년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을 표방하며, 기층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정치 군인 후안 페론이 집권하고, 아르헨티나 국민의 연인이자 성녀였던 영부인 에비타가 정열적인 탱고를 선보임으로써, 탱고는 다시 한 번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1952년 에비타가 사망하기 전까지 아르헨티나의 전역에는 수백 개의 탱고 오케스트라가 번성하였고, 크고 작은 댄스 홀에는 수만 명의 댄서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론주의가 선택한 정치적, 외교적 고립, 그리고 1955년 로나르디 군부의 집권과 경제적 공황을 겪으면서 탱고는 20여 년 동안 암울한 어둠 속에서 버려져야만 했다.

 

아르헨티나 탱고와 콘티넨털 탱고

탱고가 처음 유럽에 소개된 것은 20세기 초였으며, 1910년대에는 유럽의 상류층 사회를 중심으로 탱고 붐이 일기도 했다. 이 무렵 유럽을 사로잡은 탱고의 열풍은 미국에도 상륙하는데, 탱고 스텝을 고안하여, 대중적으로 유포시킨 무용가 카스루 부부와 이탈리아 출신의 무용가이자 영화배우였던 루돌프 발렌티노에 의해 확산된 ‘발렌티노 탱고’의 공로가 컸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탱고 음악은 유럽에서 새로운 작풍으로 작곡·연주되었고, 탱고는 전통적인 ‘아르헨티나 탱고’와 유럽의 우아한 댄스 음악이 접목된 유럽의 새로운 탱고 양식 ‘콘티넨털 탱고’로 분화되었다.

아르헨티나 탱고가 빈민굴과 선술집 등 서민들의 삶의 터전에서 비롯되었던 것에 반해, 콘티넨털 탱고는 유럽 상류사회의 무도회에서 시작되었다는 정서와 계급적인 측면에서의 뚜렷한 차이가 있다. 콘티넨털 탱고는 정박자의 리듬을 기초로 한 아르헨티나 탱고에 비해 더 가벼운 리듬감과 우아한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고전음악에 근접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가 반도네온·바이올린·피아노·베이스에 의해 연주되었던 데 반해, 콘티넨털 탱고의 오케스트라 편성 방식은 유동적이기는 했지만, 더욱 다채로운 현악기가 채용되어 실내악적인 감수성이 부가되었다. 또한 어둡고 무거운 음색의 반도네온 대신에 아코디언이 널리 채택됨으로써, 밝고 매끄러운 멜로디 중심의 음악이 되었다. 콘티넨털 탱고가 댄스 음악의 목적에 치중하고 있음에 반해, 아르헨티나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가사 중심의 노래 언어라는 특성에서도 뚜렷한 차별성을 지닌다.  

 

탱고의 부활

에비타의 사망, 그리고 기층 민중의 힘을 두려워했던 군부 독재가 탱고를 억압하면서, 탱고는 2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침묵해야만 했다. 탱고가 연주되던 클럽이나 살롱은 문을 닫았고, 자연스레 탱고 오케스트라는 하나둘 해체되었다. 탱고를 연주하던 뮤지션들도 생계를 위해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만 했으며, 수많은 초기 탱고 음악의 선구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오르케스타 티피카의 편성은 축소되고,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만 탱고는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탱고 음악이 겪은 모진 풍파와 함께 대중들의 기호도 변모했다. 이런 변화의 요구에 발맞추어 탱고 음악 역시 새로운 체질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위기는 또 다른 기회였다. 영원히 소멸될 것만 같았던 탱고가 새로운 부흥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탱고의 우상,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등장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닫혀진 음악, 제한된 음계와 화성학에 갇혀 있던 탱고 음악에 날개를 달아 드넓은 창공을 보여주었다. 그는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부착시켜 1959년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Berretin’ ‘Verano Porteno’ ‘Melancolico Buenos Aires’ 등의 현대 탱고의 걸작을 쏟아내면서 탱고의 새로운 차원과 부흥을 꾀했다.

피아졸라는 “탱고도 재즈처럼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탱고 음악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양식으로 진화·발전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내딛은 ‘새로운 탱고’(El Nuevo Tango)를 향한 선언 아래 깨어 있는 탱고 작곡가와 연주자가 몰려왔으며, 이 변화의 흐름 속에 탱고는 오늘까지 닫혀진 음악 형식이 아닌 열린 음악으로 진화하고 있다. 피아졸라의 고군분투 속에 탱고는 재즈와 클래식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음악가의 귀와 가슴을 유혹했으며, 더 이상 탱고는 아르헨티나의 음악으로만 구속되지 않았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카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카로의 탄생일인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으며, 1980년에는 탱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고 부흥의 리듬은 고조되었다. 1987년 탱고의 명곡에 당시의 스텝을 가미한 ‘탱고 아르헨티노’의 공연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음악가들은 자신의 창작에 탱고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격정과 비감 어린 음악을 넣기 위해 탱고를 향해 몰려들고 있다.

1998년 ‘탱고’라는 영화를 연출하여 탱고가 단순한 음악과 춤이 아닌, 그 자체로서 문화임을 일깨웠던 영화감독 카를로스 사우라는 “탱고의 영혼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전까지 나의 작업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라고 탱고의 의미를 밝혔다. 아르헨티나의 생선비린내 가득한 선창과 홍등가의 흐린 불빛 아래에서 태어난 탱고는 가난한 민초들의 삶에 스며 있는 애환과 영욕, 기쁨과 눈물, 집착과 한이 어우러진 고단한 삶의 기록이며, 그들이 살아가고자 하는 희망이며, 처절한 몸부림이다.

 

Canon and Gigue in D

Johann Pachelbel (1653-1706)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 D장조>는 독일 바로크 음악가 요한 파헬벨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3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해 작곡되었으며, 같은 조의 춤곡 ‘지그’가 딸려서 ‘카논과 지그’로 연주되곤 한다. <카논과 지그>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혔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재발견됐다. 1919년 처음으로 출판되면서 이 곡의 인기는 급속도로 높아졌고, 오늘날에는 여러 대중 매체의 삽입곡, 클래식 음악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되는 빈도도 높아지면서 그 인기는 가장 대중적인 바로크 음악의 하나인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에 비견될 정도이다.

 

대부분이 유실된 파헬벨의 음악

뉘른베르크 출신의 파헬벨은 자신이 활동하던 시대에 실내악 작곡으로 잘 알려진 음악가였다. 그의 세레나데, 소나타는 현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칭송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 대부분이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파헬벨 당대에 출판된 것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음악의 즐거움>(Musikalische Ergötzung)이라고 이름 붙여진 파르티타 모음집이 유일했고, 극소수의 따로 떨어진 악보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가까스로 전해지는 필사본 하나가 베를린 국립도서관에 등재된 악보이다. 여기에는 실내악 모음곡 두 곡이 수록돼 있다. 과거 베를린 예술대학이 보관하던 또 다른 필사본은 현재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파헬벨이 음악가로 활동했던 독일 뉘른베르크의 성 제발두스 성당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가 작곡되던 당시 정황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어느 작가는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가 1694년 10월 23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큰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의 결혼식에서 연주하기 위해 작곡됐다는 가설을 내놓기도 했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파헬벨의 제자였고, 이 결혼식에 파헬벨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흐의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와 파헬벨, 그리고 바흐 가문의 몇몇 사람들이 연주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파헬벨의 <카논>(지그를 제외한)은 1919년 음악학자인 구스타프 베크만에 의해 최초로 출판되었다. 베크만은 이 악보집에 파헬벨의 실내악에 관한 글을 함께 수록했다. 베크만의 연구에 영향을 준 사람은 저명한 고음악 학자이자 편집자인 막스 슈타이페르트였다. 슈타이페르트는 1925년 파헬벨의 <카논과 지그>를 편곡해 자신의 ‘오르가눔’ 시리즈로 출판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오리지널 스코어에는 나와 있지 않은 아티큘레이션 지시와 다이내믹 표시가 상당수 있었다. 슈타이페르트가 정한 곡의 템포는 근래의 연구 결과를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었다.

출처 : 뉴에이지와함께
글쓴이 : 클로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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