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결핵을 앓던 누이같은 꽃. 울밑에선 "봉선화"
봉선화 - 홍난파, 노래: 김천애 (1940 년대 녹음)
봉 선 화
작사 / 김형준, 작곡 / 홍난파, 노래 / 김천애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노라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오기는 3.1운동의 다음해인 1920년이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되기는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40년대의 일이다.
김천애가 봉선화를 제일 처음 무대에서 부른 것은 1942년 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직후 그곳 히바야 공회당에서 열렸던 신인음악회서의 일이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섰지요. 청중들의 앵콜로 봉선화를 불렀는데 청중들의 박수 갈채가 떠나갈 듯 했죠.
공연이 끝나자 청중 중의 교포들이 무대 뒤로 찾아와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지요."
당시의 감회를 회상하듯 김천애는 눈물을 글썽인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 붐을 일으켰다.
일본 경찰 당국은 드디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봉선화에 비유한 이 노래의 가사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김천애는 그 후에도 무대에 설 때 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기에 봉선화하면 누구든 김천애를 연상하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김천애 (1919-1995) 김천애님은 평양정의 여자 고등학교를 나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후 국내에 돌아와 음악활동을 했습니다.
서울대학 교 음악대학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8년 성악과장으로 제직햇고 그후 숙명여대 음대교수, 음대학장등을 역임하다가
1972년 시민회관 (지금 세종문화 회관터)에서 갖은 독창회를 마지막으로 미국에 건너 갔습니다
미국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반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국내에는 오지 못하다가 우리나라가 민주화 된 후
1990년 국내에 잠시 돌아와 KBS-TV 트집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애기를 들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독신으로 살던 님은 1995년 3월 30일 미국에서 세상을 뜨셨습니다.
- 동영상에서 퍼온 글 -
울밑에선 봉선화야
봉선화
노래 / 소프라노 김봉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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