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화 감상(국립중앙박물관소장)
'사시장춘'… 전(傳) 신윤복 그림, 종이에 담채, 27.2×15.0㎝,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한과 대한을 다 넘겼다. 추위가 끈덕져도 입춘이 코앞에서 서성거린다. 하마 봄이 그리우니 봄 그림 하나를 봐야겠다.
원래 조선 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극치는 앵도화가 피어나는 봄날의 한낮, 한적한 후원 별당의 장지문이 굳게 닫혀있고, 댓돌위에는 가냘픈 여자의 분홍 비단신 한 켤레와 너그럽게 생긴 큼직한 사나이의 검은 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장면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아무 설명도 별다른 수식도 필요가 없다. 그것으로써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는 것이다...
정사의 직접적인 표현이 청정스러운 감각을 일으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뿐더러 감칠맛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면, 춘정의 기미를 표현하는 것으로 그보다 더 품위있고 은근하고 함축있는 방법은 또 없을 줄 안다.
말하자면 한국인의 격있는 에로티시즘은 결국 '은근'의 아름다움에 그 이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해설 : 최순우)
기둥에 글씨가 있다.
떡하니 써 붙이기를, '사시장춘(四時長春)'이다. '사철 내내 봄날'이란 말씀이렷다. 배경은 살림집 몸채 뒤에 딸린 별당이다. 키 큰 나무 바늘잎에 푸른 빛이 감돌고 앉은뱅이 꽃가지에 하얀 망울이 돋긴 했다. 매화가 꽃망울를 터트린 것일까? 그런들 겨우 첫봄일텐데, '사시 내내봄'은
그림 어디에 숨었단 말일까?
먼저, 대낮인데 꽁꽁 닫힌 지게문이 수상쩍다.
문살이 반듯하고 돌쩌귀에 뒤틀림이 없다.
안에서 빈틈없이 잠갔다는 얘기다. 쪽마루는 동바리가 제법 높다. 치마 입은 여자라면 한 걸음에 오르기 어렵다. 그래서일까, 신발 두 켤레의 놓임새가 서로 다르다. 여자의 분홍 꽃신은 가지런하다. 보나마나 남자가 곁부축해줬다. 남자의 검정 갖신은 후다닥 벗은 티가 난다. 어지간히 급히 방에 들어갔다. 안에서 벌어질 일이야 묻지도 말자. 흐드러진 봄날은 뒤뜰 꽃나무에도 언덕바지 물줄기에도 아닌, 정작 방 안에 있었다.
딱하기는 계집종이다.
술잔을 받쳐 들고 오다 숨소리마저 죽인
문 앞에서 엉거주춤하는 꼴이다.
땋은 머리에 드리운 연분홍 댕기조차 애잔해 보이는 나이라서
화가는 당황한 아이의 표정을 차마 그리지 못했다.
명색이 '춘화(春畵)'인데, 이토록 얌치 바른 그림은 보기 어렵다. 봄맛이 나야 춘화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얼어 죽을망정 이 밤 더디 새기를 바라는' 겨울의 정념은 그리기에 버겁다. '사시장춘'은 어떤가.
'원앙 이불 안에 사향 각시 안고 누운' 봄날의 꿈이 아지랑이처럼 어른댄다.
봄날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정인[情人]들의 바람을 그린
사시장춘[四時長春]은 혜원[蕙園]의 춘화도[春畵圖]다.
이 그림은 신윤복[申潤福]의 춘화첩[春畵帖] 맨 첫장에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성에 덜 찬다고? 방 안에서 벌어진 풍경을 죄다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화의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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