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2.03 13:05 | 수정 : 2013.02.03 13:11
- 이병철 회장
우리나라에는 교회가 참 많다.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의하면 118종단에 7만7966개의 교회가 있다. 이게 얼마만큼 많은 숫자인가. 아마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교회 수를 편의점 수와 비교해 보았다.
2012년 2월 4일자 매일경제 기사에 의하면 전국의 편의점 수가 2만개 정도이고 10년 후쯤이면 4만개에 달할 것이라고 업계는 추정한다. 하지만 그 수가 이미 너무 많아 정부에서 편의점 사이의 간격을 규제할 정도다. 그런데 편의점의 4배 가까운 교회가 우리나라 안에 있다. 그러니 많다는 말이 맞다. 신자도 많다. 인구 센서스에 10년마다 포함되는 종교인구조사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는 전체 인구 가운데 22.8%인 1072만6463명이 불교도이고, 18.3%인 861만6438명이 프로테스탄트, 10.9%인 514만6147명이 가톨릭 교인이다.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교인을 합하면 우리나라 사람 세 명 중 한 명은 기독교인이라는 뜻이다. 역시 적다고 할 수 없는 숫자다.
그래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라고 물었다. 형식은 의문문이지만 내용은 교회와 교인들이 그렇게 많은데 사회가 왜 이 모양인가 하는 힐난으로 들린다. 우리는 이미 이와 매우 유사한 질문을 마주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적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가가 되지 못하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나는 다수의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오늘날에는 종교와 국가의 경제적·사회적 상황 사이에는 직접적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혔다. 심지어 교황이 다스리고 국민 전부가 가톨릭 신자인 바티칸시국(市國)의 국민 1인당 범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밝혀진 내용을 담은 동아일보 기사(2007년 1월 9일자)도 인용하며,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도덕적이지는 않고 기독교 국가라고 해서 모두 모범국가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 이유는 신이 단번에 죄를 사해주는 ‘칭의(稱義)’와는 달리, 인간이 거룩하게 되는 ‘성화(聖化)’는 평생을 두고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도 달았다.
이번 질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답이 가능할까?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두 도덕적이지는 않고 한국 교회가 모두 모범 교회도 아니기 때문에 사회범죄와 시련이 많다. 그리고 그것은 성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가능하다. 이것이 답이다. 그러나 이 답변에는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민의 거의 전부가 기독교인인 이탈리아나 바티칸시국과 달리 우리나라의 기독교인 비율은 30% 남짓하기 때문이다. 설령 기독교인이 모두 도덕적이라 해도 사회범죄와 시련이 줄어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회장의 질문은 다음과 같은 단서 아래서만 정당하다.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복음 5:13)라고 가르쳤고, 바다는 3% 남짓의 소금만으로도 썩지 않는다는 단서 말이다. 교회와 교인들에게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보다 높은 도덕성과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이 같은 단서 아래서 이 회장의 질문을 힐난이 아닌 죽비로 받아들여 교회와 교인이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기독교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교회란 본디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고, 그럼으로써 드러나는 한국 교회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준이 서야 판단도 서기 때문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는 ‘부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칼레오(kaleo)에 어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신구약성서는 에클레시아 앞에 보통 ‘신이’라든지 ‘그리스도 안에’와 같은 말을 덧붙여 사용한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신이 부른 사람들의 모임’ 또는 ‘(신이) 그리스도 안에 부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내어(ek-kalein) 제자로 삼았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머리로 한 이 공동체에 가담했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예수가 생을 마감하는 예루살렘까지 동행했다. “약 백이십 명”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했다.(사도행전 1:11~15)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근거인데, 여기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뚜렷이 드러난다. 교회는 신이 예수 안에 불러낸 사람들의 모임이다. 때문에 교회는 구세주로서의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 다시 말해 교회는 인간과 세계 구원이라는 신의 의지이자 약속을 실현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 이 말은 교회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예수의 사명을 위해 존재하며, 목적이 아니고 수단이고, 예수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규정했다.(골로새서 1:18)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 성격에 대해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인다. 가톨릭 신학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태복음 16:18~19)라는 예수의 선언을 주목한다. 이 말을 근거로 교회란 본질적으로 첫 교황인 베드로와 그 후계인 성직자들의 계층적 조직(hierarchy)이라는 가톨릭의 교회관이 형성되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천국의 열쇠’ 개념을 특히 중요시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를 ‘성도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천국의 열쇠를 수여받아 성례전을 시행하는 사제들의 모임’으로 파악했다. 프로테스탄트는 이에 반발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16장18~19절에 실린 내용이 예수의 말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바울 계열의 공동체들과 분쟁하던 베드로 계열의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예수의 입을 빌려 끼워 넣은 말로 추정한다. 사도 마태가 베드로 계열에 속했던 것과 유독 마태복음에만 이 말이 기록되어 있는 것,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이나 요한복음 20장 2절 이하에서 보듯이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는 기록들이 그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의 근간은 성도 모두가 사제라는 이른바 ‘만인사제설’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1519년 12월 18일자 서신에서 베드로전서 2장 5~9절에 적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같은 말과 요한계시록 1장 6절, 5장 10절에 나타난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기록들을 근거로 “우리 모두가 이미 사제입니다”라고 선포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쁜 소식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 서울 밤거리에 빛나는 교회의 십자가들. 여기에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예수가 선포한 복음에 교회가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에는 예수가 교회를 직접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신약성서에는 ‘교회(ekklesia)’라는 단어가 모두 114번 나오지만 주로 바울서신(46번)과 사도행전(23번)에서 보이고, 예수의 말을 담은 복음서에는 마태복음에만 두 번(마태복음 16:18, 18:17) 등장할 뿐이다. 그것도 위에서 언급한 대로 출처를 의심받는다. 이에 비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basileia tou theou)”라는 용어는 백 번이 넘게 나타난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의 핵심 메시지라는 뜻이다. 이 같은 정황을 가톨릭 신학자 로아지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였다”라고 표현했다.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은 예수의 목적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것을 앞당겨 오는 데 있었고 교회를 세우는 데 있지 않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복음과 교회가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것은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얼마나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신이 통치하고 구원하는 왕국’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이 통치한다’라는 개념과 ‘구원한다’는 개념이다. 예수는 숱한 ‘비유’와 ‘행위’를 통해 그것이 어떤 성격인지를 알렸다.(나중에 보겠지만 예수가 말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교훈한 사실은 기독교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알리는 예수의 행위는 피조물의 법칙인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기적’들과 세리, 창녀, 간음한 자와 같이 소외된 자들의 ‘용납’, 그리고 의인뿐 아니라 죄인들과의 ‘식사잔치’ 등으로 나타났다. 신의 통치는 자연법칙의 통치를 초월하고, 도덕적 선과 악의 구분도 뛰어넘으며, 마침내는 죄인마저 의인으로 용납하는 구원의 잔치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또 예수는 수많은 비유들을 통해서도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알렸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는 씨앗이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 결실을 맺는 “좋은 땅”(마가복음 4:1~8)으로, 겨자씨와 누룩처럼 작은 것이 크게 되는 곳이고(마태복음 13:31~33), 세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보화와 진주 같은 곳이지만(마태복음 13:44~46), 가라지가 불에 던져지고(마태복음 13:36~43) 못된 물고기가 내버려지는 것처럼(마태복음 13:47~48) 심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다.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는 ‘두 가지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5~40)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한 그 밖의 개별적·윤리적 교훈들도 모두 이 두 가지 사랑 계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자.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 다른 곳에서 예수는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44)고도 교훈했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마태복음 5:48) 우리도 온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있다. 과연 이같이 절대적인 종교적·윤리적 요청들이 실현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아마 ‘아니다’일 것이다. ‘신과 같이 온전하라’함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요청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종말론적’이라고 파악한다. 이렇게 볼 때 독일의 역사신학자 아돌프 하르낙이 주장한 대로 현실 교회는 하느님(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신국론’의 저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의 신학자들은 교회와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동일하게 보지만 현대 신학자 대부분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교회는 예수를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하느님(하나님)의 나라가 창조한 결과물이자,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고, 그것을 구현하는 도구이며, 그것을 가꾸는 사역자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의 시원이자, 교회가 떠맡은 사명이며, 도달해야 할 목표이고, 교회가 해야 할 사역이다. 이것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의 관계다.
- 서울 밤거리에 빛나는 교회의 십자가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란 무엇인가’에서 기독교인이 “의인이면서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듯이, 교회도 “성인 공동체(communio sanctorum)”이면서 동시에 “죄인 공동체(communio peccatorum)”라고 규정했다. 같은 의미에서 “현실의 교회는 죄가 많다”라고도 인정했다. 한국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년 동안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다. 하지만 괴테의 말처럼 빛이 밝은 곳에는 그림자도 짙은 법이다. 최근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다시 프로테스탄트’의 저자 양희송은 한국 교회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세 가지로 요약했다. 성직주의·성장주의·승리주의다. 한국 교회가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성직주의’와 성장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성장주의’, 그리고 타종교 내지 세상에 대해 배타적·전투적 자세를 견지하는 ‘승리주의’에 의해 본질을 상실하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주장이다. 통계자료와 현장체험을 근거로 한 진단이다. 저자는 그 해법도 제시했다. 성서에 대한 ‘거룩하고 비판적인 읽기’를 뜻하는 로고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고통과 공감의 열정’인 파토스, 실천을 통해 ‘일상에서 쌓아 올린 신뢰’를 의미하는 에토스가 그것이다. 요컨대 성서를 바로 알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갖고 일상에서 그것을 실현하자는 말이다. 다분히 공감이 가는 해법이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하고 싶다. 우리는 지금 교회와 교인들의 도덕성을 따져 묻는 이 회장의 질문과 연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초점을 맞춰 다시 설명하고 싶다는 뜻이다. 위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교회는 본디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아 수행하는 모임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했던가. 예수는 막연히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공(公)생애 3년 동안 내내 손수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세리·창녀·간음한 자와 같이 소외된 자들을 용납하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말’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 알렸다는 의미다. 때문에 예수의 모든 ‘말’뿐 아니라 모든 ‘행위’가 사람들에게 전해져야만 하는 것이며, 그래서 예수 자신도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묻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할 때 “너희가 가서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라고 하지 않고, “너희가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마태복음 11:4)라고 답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교회와 교인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전할 뿐 아니라 행위를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단지 성화를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성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죄를 사해주는 ‘칭의’는 신의 사역이지만 거룩하게 하는 성화는 교회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교회의 본질은 오직 성도의 성화에 있으며, 교회는 단지 성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성화를 두 가지로 정의했다. 하나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와 거룩하게 되는 ‘성결’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으로 들어가 섬기는 ‘사랑’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다시금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 아닌가! 또 웨슬리는 성화의 핵심을 ‘사랑’으로, 사랑의 핵심을 ‘나눔’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유대인은 10분의 1을 나누어 주고, 바리새인은 10분의 2를 나누어 주지만, 기독교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신도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한 모든 것을 선교와 구제를 위해 썼다. 실업자에게 일거리를 찾아주고, 고아·과부·병자들을 돌보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신용조합을 설립하여 돈을 무이자로 대여하고, 노숙자들을 위해 ‘나그네를 위한 친구회’와 ‘가난한 자를 위한 집’을 설립하는 등의 사역을 통해 하느님(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 한국 교인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행위가 아닌가! 그래야만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라는 ‘조금은 부당한’ 힐난 앞에서도 떳떳해지지 않겠는가!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