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 】

솜털까지 생생한 붓질…19금 춘화전 가보니

자운영 추억 2013. 2. 3. 19:14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3.02.03 03:14 / 수정 2013.02.03 14:38

가식 없는 에로티시즘 감칠맛 나는 해학과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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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지긋한 분들은 “어흠” 마른 기침을 연발했고 젊은 처자들은 어느새 볼이 발그레해졌다.

19세 미만의 관람객은 출입이 금지된 이곳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 2층. ‘옛사람의 삶과 풍류 -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2월 24일까지) 전시 중 조선시대 춘화(春畵)전이 열리고 있는 곳이다. 관아재 조영석, 긍재 김득신, 긍원 김양기, 혜산 유숙, 소당 이재관, 심전 안중식, 기산 김준근 등 조선 후기 최고 화가들의 풍속화도 볼거리지만, 아무래도 대중의 관심은 남녀상열지사를 적나라하게 그려낸 춘화전에 쏠리고 있다. 원화 화첩 전체로는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는 『운우도첩(雲雨圖帖)』(19세기 전반)과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1844년께)에 실린 이 그림들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화풍으로 전해지는 것들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이 그림들이 “조선 후기의 수준 높은 회화성을 보여주는, 한국 춘화의 백미”라고 말한다. 그는 “때론 해학적이면서 낭만이 흐르고 때론 과장하지 않고 가식 없는 에로티시즘이 우리 춘화의 감칠맛이자 아름다움”이라며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그 속에서 호흡하는 성표현은 생동감 넘치며, 안정된 회화적 조형미는 빼어나다”고 덧붙였다(이 교수는 13일 오후 2시 갤러리 현대 신관 전시장에서 ‘조선 춘화의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강의한다).

인터넷만 들어가면 오만가지 요상한 영상이 뜨는 21세기 우리에게 한지에 그려진 19세기 남녀가 얽혀 있는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에게서 조선 춘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 전시회를 기획할 때 조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다. 주위에서도 염려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춘화(春畵)란 결국 에로틱 회화라는 얘기인데 그걸 일반에 공개해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었고, 또 어떤 이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우려라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장담했다. 우선 이것은 춘화라는 말만 들었지 제대로 된 춘화를 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우려였다. 춘화는 음화(淫畵)와 다르다. 외설과 예술의 차이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항상 문제로 되는 일이지만 그 잣대는 작품의 예술성 여부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성적 호기심만 자극하는 조악한 음화라면 당연히 전시회로 꾸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풍속화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는 회화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비록 사시장철 공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잠시 그 비공개 영역의 빗장을 열어 우리 미술사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전시에 다녀간 관객들은 한결같이 “옛 사람들의 삶의 뒤안을 리얼하게 볼 수 있었고 조선시대 풍속화를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는 감상을 말하고 있다.

에두아르트 푹스는 『풍속의 역사』에서 “한 시대 사회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은 성의 표현에 있다”고 단언했다. 정상적인 성관계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인간의 삶 속에 있는 일이고 그것은 개개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스러운 영역이지만, 성의 유희성을 노출하여 자신의 비밀과 대조하는 일 또한 어느 사회 어느 시대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한 사회에서 변화적 기류가 일어날 때는 성의 관습으로부터 일탈하려는 경향이 우선적으로 감지된다고 했다. 이를테면 신흥 부르주아의 등장은 기존의 성적 관습을 훌쩍 벗어나려는 경향과 맞물려 있다. 때문에 춘화와 같은 에로틱 회화는 문명이 침체되었거나 문화가 쇠퇴해 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꽃피는 전성기에 유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은 허풍, 일본은 노골적, 인도는 기기묘묘

1976년 덴마크에서는 ‘세계 에로틱 아트 전시회’가 열렸고 전 작품을 수록한 도록도 나왔다. 총 860점이 수록된 이 도록을 보면 유럽의 중세부터 20세기 현대 거장의 작품까지 망라되었고, 일본· 중국·인도·몽골의 춘화까지 실려 있다.

유럽 중세의 춘화는 나이브 페인팅에 가까운 순진한 것이고,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춘화는 궁중화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프랑스 혁명기에는 일러스트레이션이 많다. 19세기 리얼리즘 시대는 귀스타브 쿠르베가 레즈비언을 그린 ‘게으름과 음탕’, 여자의 성기를 클로즈업한 ‘세계의 기원’이라는 작품이 있다. 20세기의 대가인 피카소, 고갱, 에곤 실레,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그들의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양의 춘화로는 성희의 갖가지 자세가 무술영화의 허풍처럼 과장되게 그려진 중국의 춘궁화(春宮畵), 과장된 성기 묘사로 이미 정평 있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會)가 여러 점 출품됐다. 인도의 춘화는 거의 다 요가를 연상케 하는 기묘한 동작의 성희로 일관되어 있고, 몽골의 춘화는 한결같이 말 타고 달리면서 말 위에서 섹스를 하는 그림들이다. 그림마다 민족적 특성을 그렇게 반영하고 있다.

이때 조선 춘화가 단 한 점도 출품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조선시대 춘화가 오늘날에 오도록 여전히 성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음화로 인식되어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었으니 먼 구라파에서 어떻게 조선 춘화의 가치와 묘미를 알 수 있었겠는가. 만약에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춘화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이나 『운우도첩(雲雨圖帖)』같은 작품이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면 한국 회화의 독자성을 얼마나 잘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인가.

이 두 화첩은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춘화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건곤일회첩』은 ‘하늘과 땅이 하나로 만난다’는 뜻이니 음과 양의 만남을 말하는 것으로 12폭에 혜원 신윤복의 낙관이 있다. 『운우도첩』은 비구름이 뒤엉켜 하나로 되었다는 뜻이니 성희를 상징하는 것으로 10점에 단원 김홍도의 도인이 찍혀 있고 운보 김기창의 배관(拜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도서 낙관은 후대의 누군가가 추가한 후낙관으로 보인다. 본래 춘화는 그림의 성격상 화가가 당당하게 도서낙관을 하기 힘들다. 혜원은 춘화를 그렸기 때문에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그래도 이 화첩들이 단원과 혜원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것은 인물 묘사와 자연 풍광을 그린 필법에서 보여준 그들만의 섬세한 필치와 뛰어난 묘사력 때문이다.

춘화에 등장하는 여인의 표정을 보면 그렇게 정확할 수가 없다.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찬사가 절로 나오게 되는데, 한 한국화가는 “도대체 얼마나 가는 붓을 사용했기에 귀밑머리 솜털까지 그렸을까” 하고 감탄했다. 그런가 하면 인물화를 잘 그리는 중년의 한 화가는 “당시는 사진으로 찍어놓은 이미지를 갖고 그린 것이 아닐 게 분명한데 인체비례를 이렇게 정확히 맞춘다는 것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자가 엄지 발가락을 비튼 것 좀 보라”고 귀띔했다. 그래서 만약에 단원·혜원이 그린 것이 아니라면 단원·혜원보다 더 잘 그리는 화가의 솜씨일 수밖에 없다는 평도 나오고 있는 것이다.

조선 춘화의 최고봉 『건곤일회첩』과『운우도첩』

세계 에로틱 아트의 역사 속에서 조선 춘화가 지닌 특성을 말하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스토리텔링’에 있다. 장면마다 그 성희가 일어나게 된 배경이 어떤 식으로든 묘사되어 있다. 어느 기방에서의 한 장면, 양반이 여종을 희롱하는 것을 엿보는 장면, 진달래꽃 만발한 야산이나 버드나무 사이로 보름달이 훤히 비치는 한밤중 냇가에서의 정사, 봄볕 따사로운 날 툇마루에 앉아 늙은이 둘이 성기를 내보이며 옛날을 회상하는 장면 등 때론 유머가 넘친다. 그래서 조선 춘화에는 낭만과 풍류의 연장을 느끼게 하는 시정과 서정이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일본의 우키요에 춘화는 한결같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춘화 역시 갖가지 변태적 장면이 요란하게 연출되지만 우리 같은 서정성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다. 때문에 조선 춘화를 보면 실내 가구와 집기들의 묘사, 자연풍광 표현이 대단히 정밀하다. 그 배경에 대한 세심한 묘사 때문에 이야기는 명확히, 그리고 재미있게 읽힌다.

춘화의 예술성은 무엇보다도 정교한 필치에 있다. 춘화일수록 묘사가 정확하고 필치에 정성이 들어 있고 색감이 풍부해야 한다. 조악한 음화는 성기만 과장하고 성희의 동작만을 강조한다. 그것은 카메라가 없던 시절의 질 낮은 포르노그래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수준의 그림이라면 감히 ‘옛 사람의 풍류와 낭만’이라는 표제를 달 수 없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성행위를 그렸다고 다 춘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중에는 음화라고 외면당할 작품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대하는 춘화는 그 작가의 예술세계와의 연장선상에서 감상되고 평가될 만한 것이다. 단원·혜원의 춘화가 그들의 풍속화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내가 이제까지 본 조선시대 춘화첩은 10점 내외다. 그중 이와 같은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은 모처에 소장된 것으로 전하는 2첩뿐이다. 그중 하나는 혜원이 그린 것이 분명하고 또 하나는 단원이 그렸다고 전하지만 시산 유운홍 또는 혜산 유숙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외에 내가 본 춘화첩들은 단원·혜원의 작품을 모작(模作)한 것들이며 그 필치와 묘사력이 아주 떨어진다.

춘화의 역사는 후대로 이어져 정재 최우석 등이 단원·혜원 춘화를 베껴 그린 것이 몇 첩 있는데, 그 솜씨는 말할 것도 없고 조형적 성실성이 떨어진 퇴락한 춘화가 되고 말았다. 오히려 개화기 구한말 때 목판화로 제작하고 겉 표지와 속 내용을 국한문 혼용 불경으로 위장한 춘화첩이 유머도 있고 세태를 반영한다. 그러나 이 역시 조형적 밀도가 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 춘화의 역사는 단원·혜원 시절인 정조시대가 전성기며, 그 이전의 작품은 알려진 것이 없고(있다고 해야 이런 높은 수준은 아닐 것이며) 그 이후는 쇠퇴의 길로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춘화의 역사는 풍속화의 역사와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로 그것이 조선시대 회화사와 문화사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내 빛본 한국 회화사의 감춰진 장르

현대미술에 들어와 춘화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내놓고 공개한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있기는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술의 역사에 춘화가 없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직 내놓고 공개할 수 있는 역사적 거리가 확보되지 못해서 모르는 점도 있다. 다만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조시대 같은 문예부흥의 기류와 문화적 풍요를 누리지 못했으니 아마도 미미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이런 미술사적 관점에서 이번 전시회에 만약 『건곤일회첩』과 『운우도첩』같은 작품이 출품될 수만 있으면 사람들은 조선시대 춘화의 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장담했던 것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작품을 공개해 굳게 닫혔던 빗장을 잠시 열고 한국 회화사의 감추어진 또 하나의 장르를 공유할 수 있게 해준 소장가분들께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다.

그리고 관객들이 이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전에 와서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 내 예견이 맞았다고 자부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감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갤러리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