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부론’의 교훈
한 마리 개가 어떤 모양(形)에 짖자,
백 마리 개가 그 소리(聲)에 짖는다.
一犬吠形, 百犬吠聲 - 왕부, ‘잠부론’
한 마리 개를 짖게 만든 것은 ‘형’(形)이다. 형은 외형이다. 그것은 겉모양이라, 실상을 알 수 없다. 한 마리 개는 그 모양이 이상하고 두려워서 짖었을 것이다. 백 마리 개는 한 마리 개의 짖는 소리(聲)를 듣고 짖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지만 실상을 본 것처럼 짖는다.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백 마리 개처럼 떠드는 사람들 때문이다. 중국 한나라의 왕부(王符)가 위 문구를 속담으로 기록하고 해설을 더했다. “세상에 이런 병이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옳고 그른 사정을 살피지 않는 것을, 나는 걱정하노라.” “형(形)이란 그림자”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세상을 시끄럽게 한 것은 한갓 그림자일 수 있다.
위 속담이 실린 왕부의 책은 ‘잠부론’이다. ‘잠부(潛夫)’란 잠적한 사람이다. 움직이지 말아야 할 때 움직이면 흉하게 된다. 재주가 부족하거나 때가 적절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를 멈추고 기다림이 상책이다. 이러한 때를 일러 ‘잠(潛)’이라고 ‘주역’에서 칭하였다. 왕부는 스스로를 ‘잠부’라 부르면서 세상의 속된 일을 기롱하여 ‘잠부론’을 저술했다.
# ‘잠부론’을 아낀 조선의 선비들
‘잠부론’은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고전의 대열에 올려놓고 아껴 읽은 책이다. 성균관박사에 오른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공이 높았던 여대로(1552~1619)가 ‘잠부론’의 속담을 다시 옮겼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한꺼번에 천백 마리 개가 짖네.
개들은 무엇 때문에 짖나?
한갓 소리만 듣고 눈으로는 보지 않았거늘.
一犬吠, 二犬吠, 一時吠千百.
群吠爲何物. 徒耳不以目. - 여대로, ‘개 짖음을 듣노라’(聞犬吠)
여대로는 덧붙였다. “시끄러운 것이 싫어서 얼러주고 싶지만, 이놈들이 측간까지 쫓아올까 걱정이로다!” 시끄러워도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속된 인간들은 가르치기도 다스리기도 어렵다.
# 개 같은 사람들
우리 옛말에 ‘개’가 붙으면 천한 것이다. 지천의 개나리, 먹지 못하는 개살구와 개머루, 쓸데없는 개꿈 등. 요즈음 쓰는 말로 개망신, 개수작, 개죽음 등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중국 당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은 개에게 비루한 시기심(猜)이 있어 해를 보고 눈을 보고 짖는다고 하고, 시기심이란 모든 악(惡)의 근원이라 경계하였다. 조선후기 학자 위백규(1727~1798)는 개가 비천한 이유와 개 같은 사람의 속성을 말했다.
개는 도둑을 잡고자 짖어야 하거늘,
개 중에는 제대로 짖지 못하는 녀석이 있다.
관복을 차려 입은 손님이 오셨는데 짖고,
달이 밝게 떴는데 짖고,
눈이 하얗게 왔는데 짖는다.
이런 개는 지극히 천한 녀석이다.
사람 중에 떠들고 화내기를 좋아하고 변덕이 심하면
이 또한 천박한 사람이다. - 위백규, ‘격물설’
시기하여 짖는 개, 쓸데없이 짖는 개는 비천한 개다. 사람도 그러하다. 개 같은 사람이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다. 시기하지 말라. 모르면 호들갑 떨지 말라. 화내기 전에 혹은 마음을 바꾸기 전에 먼저 생각하라. 개 같은 사람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 패러디의 마력
‘패러디’란 이미 있는 말과 생각을 사용하면서 그 본래의 뜻을 변형시키는 유희이다. 알던 것을 변화시키면, 새로 만든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 옛 그림과 시문에 맛깔스러운 패러디가 많다. 패러디를 거치면, 말의 뜻이 달라지고 생각이 뒤집힌다.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득신(1754~1822)의 ‘출문간월도(出門看月圖, 문을 열고 달을 보다)’를 보면, 한나라 속담의 교훈적 언어가 장난스럽게 변화되어 있다. 그림 왼편에 앉은 개를 보라. 입을 크게 벌리고 컹컹 짖는다. 그 위에 적힌 글은 ‘잠부론’의 교훈어투 그대로인데 개 짖는 사연이 사뭇 다르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만 마리 개가 이 한 마리 개를 따라 짖네.
동자를 불러 문 밖으로 나가 보라 하니,
“달님이 오동나무 제일 높은 가지에 걸려 있어요!”
一犬吠, 二犬吠, 萬犬從此一犬吠.
呼童出門看, 月??梧桐第一枝.
이를 말하는 인물은 가옥 안의 선비이다. 선비의 심부름에 나와 선 동자가 그림에 등장했다. 동자가 살펴보니 아무 일도 없다. 오동나무 저 끝에 달님만 둥실. 동자는 우두커니 섰다. 그렇다면 개도 달을 보고 짖었을 테지. 그것은 달빛에 어른대는 오동잎의 그림자였을지도 모른다.
‘잠부론’에서 짖어대던 개를 달빛 아래 천진스러운 개로 바꾸어 부른 이 노래는 패러디이다. 이러한 노래문화는 적어도 조선중기에 정착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경전(1567~1664)의 문집을 보면, 그가 13세에 지었다는 한시 한 편이 위 그림의 제발과 매우 흡사하다. “한 마리 개가 짖자, 두 마리 개가 짖고, 세 마리 개도 따라 짖네. 사람일까? 호랑이일까? 바람소릴까? 동자가 말하네. 달이 산 위에 올라 등불 같고요, 뜰의 반에는 추운 오동만 버석거려요!”(一犬吠, 二犬吠, 三犬亦隨吠. 人乎虎乎風聲乎. 童言山外月如燭, 半庭唯有鳴寒梧.) 어린 소년 이경전이 그 당시의 노래를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 노래는 오래도록 전해졌다. 조선후기 김득신의 그림 위에 다시 적힌 사연이다.
그림을 보라. 짖는 개가 귀엽고 동자는 순진하다. 고개 들어 둥근 달을 바라보는 한가로움. 함께 사는 선비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 맘이 이렇게 한결 같아도, 어리석은 부화뇌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한 마리가 짖자 만 마리가 짖는다는 말은 같지만, 뜻은 완전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패러디의 마력이 이것이다. 한 마리가 짖자 만 마리가 짖는데, 달을 보고 짖는다니 재미있고 기분 좋다. 개 짖는 소리는 달밤의 운치로 울리면서 그림 보는 우리를 달빛으로 인도해준다.
# 반갑고 복스러운 개
개라는 동물은, 사실상 얼마나 다정한 인간의 동반자인가. 쓸쓸한 시골집의 개 짖는 소리라면 상상만 해보아도 마음이 훈훈하다. 소리의 활기참이 좋고 기다리던 사람일까 설레니 좋다.
그뿐인가. 집집마다 개가 짖고 닭이 울어야 살 만한 마을이다. 5세기에 도연명이 ‘무릉도원’을 꿈꿀 때 그곳에 개와 닭의 울음이 들린다고 했다. 도원의 넉넉한 경제사정을 효과적으로 표시하기 위해서다. 개 짖고 닭 우는 소리는 이미 ‘노자’로부터 농경 유토피아의 절대조건으로 통하고 있었다. 없어서는 안 될 가축이요 먹거리였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선비들이 좋아했던 송나라의 소동파는 달 보고 짖는 개를 일러 ‘영방(靈尨)’이라 불렀다. ‘영방’이란 신령스러운 삽살개다. 우리 선비들도 달 보고 짖는 개를 신선의 개라 하여 영방, 천방(天尨) 혹은 선방(仙尨)이라 불렀다. 하늘 보고 짖는 모습이 신선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리라. 촌방(村尨), 즉 촌마을의 삽살이도 달을 보며 짖으면 그 모습이 신선개로 보였으리라. 개가 할 일 없어 하늘 보고 짖는 마을, 사람도 덩달아 신선되는 기분이다.
황색 누런 개가 황금빛 달을 바라보고 짖는 것은 더욱 좋게 보았다. 옛 점성가는 ‘금구폐월(金狗吠月)’의 별자리를 말했다. 금빛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뜻이다. 옛 풍수가는 땅의 생김새를 보아 온갖 이름을 붙였는데, ‘황방폐월’(黃尨吠月)의 땅모양도 중시하였다. ‘황방폐월형’이라 하면, 머리를 치켜들고 짖는 개의 형상을 가진 땅이며, 복된 길지였다.
# 오동 추!
‘출문간월도’를 다시 보자. 화면에서 가장 큰 물상이 무엇인가. 화면을 가로질러 우뚝 자란 나무 한 그루, 오동(梧桐)이다. 이 오동이 없었다면, 장담컨대 이 그림은 한국회화사 수작으로 꼽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화가는 과감하게 먹물을 베풀어 오동잎을 그렸고, 옛 노래는 오동에 달이 걸렸다고 노래했다. 왜 하필 오동일까.
‘장자’에 이르기를, 오동나무 아니면 봉황새가 내려앉지 않는다고 했다. 봉황은 태평한 시절에만 세상에 나타나는 환상의 새다. 상서로운 봉황이 가려 앉는 나무라 하여, 오동은 나무 중에 으뜸으로 우대되었다. 줄기 푸른 벽오동이면 더욱 좋다. 오동은 또한 거문고를 만드는 목재였다. 가을에 바람 불어 오동잎이 서걱대면, 그것이 봉황의 곡조 혹은 거문고의 연주라 읊어졌던 이유이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뜨락에 오동을 심고자 했다. 그림 속 오동나무는 장대하고 무성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든든하고 시원하게 해준다. 오동나무를 가꾸는 가옥 안의 선비도 그런 인격이라고 암시해준다.
오동에 무서리가 내리면 그 모습이 남다르다. 커다란 오동잎이 떨어지면서 사람들 가슴속에 가을이 깊어지고 겨울이 다가온다. 오동에 서리 내리고 달이 매달리면, 조선후기 사람들 혀끝에 뱅글뱅글 노랫말이 맴돌았다. 오동 추(秋)에 밝은 달을 그리는 ‘오동추야가’(梧桐秋夜歌, 오동잎 시드는 가을밤 노래)다. ‘오동추야가’는 그 시절의 인기곡으로, 중국 갔던 사신들이 무사히 당도하면 접대의 연회에서 즐겨 불리던 노래이다.
# 그림의 선비는 노래로 그리던 분
이 작은 그림 ‘출문간월도’에는 개 짖음의 교훈과 시정이 어울려 담겨 있다.
선비라면 마땅히 개 짖는 소리에 ‘잠부론’을 떠올릴 일이다. 한 마리 개, 백 마리 개, 저들이 왜 짖는가. 옷깃을 여미고 시끄러운 세속을 경계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그렇지만 개에 대한 애정과 인정이 교훈 너머로 흘러넘친다. 아, 우리 누렁이 달을 보고 짖었구나. 오동나무에 달이 걸렸으니!
세상만사는 마음먹은 대로 보이기 마련이다. 세상에 염증을 느낄 때는, 개 짖는 소리가 듣기 싫다. 덩달아 짖는 소리는 사람들의 시비소리 같아 더욱 싫다. 개는 개라서 싫고, 사람은 개를 닮아서 싫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알게 된다. 개가 무슨 잘못인가. 짖는 소리가 반갑고, 덩달아 짖는 소리가 다정하다. 개를 일러 비루하다 한 것은, 어리석은 사람을 조롱하는 곡진한 가르침이었다.
개들의 달밤 합창이 한 차례 지나가면, 고요가 찾아들고 달이 기울 것이다. 신윤복이 그렸다고 전하는 ‘나월불폐(蘿月不吠, 넝쿨 속에 달이 뜨고 개는 짖지 않네)’란 그림이 있다. 작은 비단그림이다. 달빛 아래 앉은 개가 사색에 잠긴 듯 조용하다. 짖어 보니 달빛이라, 충실하고 착한 개는 묵묵히 홀로 깨어 밤을 지킨다. 어느 선비집의 추워지는 뜨락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