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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통 홍어의 고장, 영산포가 다시 들썩인다

자운영 추억 2012. 12. 1. 23:26
나주 | 배명재 기자 ninaplus@kyunghyang.com
지난 29일 늦은 오후, 석양이 영산강에 몸을 풀면서 강마을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었다. 때마침 강 아래쪽에서 황포돛배 1척이 쏜살처럼 영산포 등대 앞 부두로 들어왔다. 강 하류 쪽으로 10㎞를 내려갔다 올라오는 유람선이었다. 그 옛날 호남벌에 바다의 풍요로움을 더해주던 고깃배도, 화물선도 아니었지만 황포돛배는 날마다 영산포에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울긋불긋 나들이복 차림의 남녀 10명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배에서 내렸다. 강둑으로 오는 이들이 바로 옆 ‘홍어의 거리’ 식당 금일홍어로 들어섰다. 2만원짜리 ‘홍어정식’을 주문했다. 푸짐한 밑반찬과 막걸리가 먼저 나왔다. 술잔을 돌리던 김모씨(56·광주 남구 학동)가 쭈뼛쭈뼛 말문을 열었다.

“‘홍어 거시기’가 있으면 좀 내놓으시오. 대통령 선거판에서 ‘홍어×’ ‘홍어×’ 그러는디,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봅시다.” 순간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점심 때 오신 아주머니들도 내놓으라고 야단이던디. 또 보자네.” 주인 안태선씨(50)가 맞장구를 치자 식당 안 다른 손님들까지도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먹기도 흉하고 해서, 숙성옹기에 담기 전에 아예 잘라 버리는디, 어쩌까이. 홍어는 암컷이 비싸요. 그래서 옛날 홍어장수들이 ‘거시기’를 보자마자 싹둑 잘라버리고 암컷으로 팔았다는구만요. 가장 소중한 것인디, 거리낌없이 칼질을 해대니, 홍어 입장에서는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구나 했겠죠.”

손님들의 의미있는 논평도 보태졌다. “‘만만한 게 홍어×’이라는 말이 그렇게 해서 나왔구만요. 뭔가 억울한 일, 쓸데없는 짓, 남을 속이는 일, 그런 뜻이네요.” “그런데 정치한다는 작자들이 ‘홍어×’만한 가치라도 되는가 모르겠어. 맨날 거짓말하고, 돈 먹다 들키면 오리발이나 내밀고.” “이번 대통령은 홍어처럼 수입해다 쓰면 좋겠구만.”

전남 나주 영산포에서 ‘금성수산’을 운영하는 정갑선·김지순씨 부부가 홍어를 숙성시키는 작업을 하던 도중 환하게 웃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고려말 이주한 흑산도 사람들 고향의 맛
90년대 중국 저인망 어선 몰려와 위기도
수입 홍어에 숙성기술 더해 ‘제2의 전성기’
해외까지 수출… 시에선 포구 복원 사업


초겨울 영산포의 저녁은 온통 홍어가 화두가 됐다. 영산포는 ‘홍어의 고향’이다. 홍어가 먼바다 밑에 사는 생물인데도 육지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산포는 그렇게 불린다. 영산포는 영산강 하구인 목포에서 상류로 65㎞ 떨어져 있다. 홍어와 영산포의 인연은 6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 ‘공도(空島)정책’이 중매역할을 했다.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지면서 섬 주민들을 뭍으로 올라와 살도록 한 강제조치였다. 그때 홍어를 잡던 흑산도 일대 주민들이 배를 타고 이곳 영산포로 이주했다. 그들은 비록 낯선 땅으로 오기는 했지만 고향의 맛까지 잊을 수는 없었다. 물때를 맞춰 몰래 흑산도까지 노를 저어 홍어를 잡아왔다. 보름 이상 걸리는 머나먼 항해였지만 ‘찰떡보다 차진 홍어’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영산포까지 올라오면서 홍어는 애석하게도 푹 삭아버리고 말았다. 지독한 냄새까지 났다. 그렇지만 차마 아까운 고기를 버릴 수 없었다. 그대로 먹어보니 먹을 만했다. 그 절박한 고향의 맛, 그 엽기적인 애물은 남도의 잔칫상을 점령하더니 냄새만큼이나 지독한 전염력으로 기어이 오늘날의 별미 ‘국민홍어’로 떠올랐다.

‘홍어의 고향’ 전남 나주 영산포에 노을이 지고 있다. 영산포는 1990년대 초 흑산도 홍어 공급이 끊기면서 지역경제가 쇠락했지만 이후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수입 홍어 등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영산포는 여전히 서남해안 대표항구인 목포보다 더 큰 홍어시장이 열려 있다. 물론 ‘삭힌 홍어’를 판다. 현재 영산포구 영산교 다리를 중심으로 42개 판매점이 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 판매점은 식당과 함께 대부분 가공공장도 갖고 있다. 골목골목 이들 공장에선 20일 이상 숙성한 홍어를 가져다 먹기 편하도록 켜켜이 살을 발라낸다. 바로 손질된 홍어는 음식점으로 옮겨지고, 택배주문을 받아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영산포 홍어상인연합회 김영수 회장(45)은 “갈수록 홍어를 찾는 분들이 많아지는 것을 실감한다”면서 “겨울철엔 택배주문도 2배로 늘어난다”고 즐거워했다.

한때 ‘시장의 위기’도 있었다. 1990년초부터 불법 중국 저인망 어선들이 몰려온 탓이었다. 홍어잡이를 할 수 없을 만큼 바다환경이 악화되면서 육지의 영산포가 밥줄이 끊길 상황으로 내몰렸다.

‘홍어명인’ 곽정덕 할머니(80)는 마음을 졸였던 당시를 털어놨다. 그는 “10년여간 흑산도 홍어가 올라오지 않으니까 살 길이 막막했다”면서 “그때 수십년간 해오던 가게를 닫고 떠난 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던가. 파리만 날리던 상인들이 ‘수입홍어’라는 출구를 찾아냈다. 칠레·아르헨티나산 홍어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 국내산보다 가격이 5~6배나 낮은 것이 더 매력이었다. 여기에 수백년 내려온 숙성기술로 맛도 그대로 살려낼 수 있었다. 금방 ‘홍어의 거리’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20여개 소규모로 명맥을 유지하던 홍어가게가 매년 2~3개씩 늘어났다. 서울·부산 등 외지인도 5명이나 들어왔다. 1998년 초에 ‘영산홍어’를 개업한 강건희씨(63)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강씨는 서울 출신이다. 원양어선 선장도 지냈다. 인맥이 탄탄해 홍어 수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한몫했다. 강씨는 홍어를 2002년부터 백화점과 대형마트에 납품해오고 있다. 어물전에서나 팔던 ‘냄새나는 고기’의 품위를 높인 것이다. 상인들은 또 자체적으로 산뜻한 디자인의 상자, 홍어를 깔끔하게 토막내는 기계도 만들었다.

1950년의 영산포 전경.


전남 나주 영산포의 주요 거리에는 홍어를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이렇게 홍어가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영산포는 그 옛날의 영화를 되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있다. 나주시가 예산 32억원을 들여 포구 복원사업을 대대적으로 펴고 있다.

영산포는 드넓은 나주평야를 끼고 있어 시대를 넘어 정치세력들이 늘 탐을 내던 공간이었다. 특히 일제 때는 곡물 수탈기지가 되면서 일본식 대저택들과 은행, 정미소, 경찰분소 등이 자리를 잡고, 대형 화물선도 수십 척이 드나들면서 목포항보다 훨씬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1978년 영산강 하굿둑 건설로 뱃길이 끊기면서 갑자기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복원사업은 내년 6월까지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과 관공서를 카페와 갤러리, 전망대 등으로 꾸미고, 1950~1960년대 풍광을 그대로 간직한 강마을 골목골목을 운치있게 만드는 것이 주내용이다. 부두는 이미 재단장돼 지난 9월부터 유람선 3척이 뜨고 있다.

영산포가 다시 들썩거리고 있지만 강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맘속에 큰 소망 하나를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부두 등대 앞에서 만난 지용일 할아버지(78)가 주민들의 속내를 대변했다. “물은 우리한테 늘 하늘이었어. 하늘을 그렇게 무시하고 물길을 막아놨으니 영산강이 모두 썩어버린 것이지. 강을 따라 사람들만 가난하게 된 거여. 어서 하굿둑을 시원히 터버렸으면 좋겠어. 그리고 배를 타고 먼바다 흑산도까지 가보고 싶어.”

■ “숙성실 들락거리며 애기 돌보듯해야 진짜 홍어쟁이지”
‘금성수산’ 정갑선·김지순씨 부부


영산포 ‘홍어의 거리’에 들어서면 황포돛배 모양을 본뜬 매표소가 있다. 유람선 탑승권을 파는 곳이다. 바로 그 앞집이 1953년부터 홍어만을 팔아온 ‘금성수산’이다. 검정색 바탕에 흰색글씨로 쓴 ‘김지순 홍어’라는 간판도 함께 붙어 있다. 이곳이 영산포에서 가장 오래된 판매점이다.

가게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니 널따란 토굴 2개가 나왔다. 코와 눈을 찌르는 강한 냄새가 풍겨났다. 주인 정갑선(74)·김지순(70)씨 부부가 한창 숙성 중인 홍어를 살피고 있었다. 정씨는 아버지와 형님이 꾸리던 가업을 1964년부터 이어받았다. 올해로 48년째다. 정씨가 부인 김씨에게 “늘 아기 보살피듯 해야 홍어맛이 나는 것”이라며 핀잔을 놓으며 토굴을 나왔다. 김씨도 “그 얘기 천만번도 더 듣는다”며 대꾸했다.

‘홍어 명인’으로 통하는 부부 사이의 대화에서 ‘맛있는 홍어’를 내는 비법이 묻어났다. 정씨는 “손님들이 우리 홍어가 톡쏘는 맛이 뛰어나고 고기질도 쫀득쫀득하다는 말을 한다”며 자랑했다.

부인 김씨가 ‘상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귀띔했다. 김씨는 홍어식당을 하던 부모를 보며 자랐다. 그래서 남편보다 더 홍어전문가로 통한다.

“우리는 숙성을 2단계로 하는디, 여기서 맛이 결판나부러. 저양반 말마따나 4~5도(섭씨온도) 되는 숙성실로 들락거리며 애기 돌보듯해야 하지. 매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것을 느낄 정도가 돼야 진짜 홍어쟁이이지.”

이런 정성 때문에 국내외에 단골고객이 많아지고 있다고 했다. 대형마트 2곳의 전국매장에도 납품을 하고 있다. 맛소문이 나면서 수출길도 열렸다. 2010년초 두바이를 시작으로 밴쿠버·마닐라·오사카 등 4개 도시로 보낸다. 매달 한번꼴로 12㎏ 들이 상자(52만원) 8~10개씩 나간다. 수출품에는 꼭 ‘김지순 홍어’라는 상표를 붙인다.

홍어 수요가 늘어나면서 2~3년 전부터는 아들 2명과 사위도 가세했다. 아들 둘은 예식장과 호텔 등의 판촉을 맡고, 딸 부부는 자연스럽게 생산을 맡게 됐다. 여전히 숙성 과정은 ‘비방’을 갖고 있는 주인 정씨 부부의 몫이다.

주인 정씨는 “홍어가 우리가족 16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둘째 아들 윤수씨(41)는 “부모님이 40년 이상 터전을 닦아놓아 영업도 수월하다”면서 “홍어 냄새가 늘 향긋하다”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