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나무·야생화

봄의 전령 매화, 초여름엔 매실로 영글어 ‘엄마 약손’

자운영 추억 2012. 7. 9. 22:34

김성호 2012. 07.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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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의 풍모, 오매 염매 매실고 등으로 ‘변신’

 설사나 중풍 체증 등에 특효인 ‘가정 상비약’


 

 Prunusmume.JPG » 매화나무에 탐스럽게 열린 매실. 속탈을 달래주는 약재는 물론이고 여러 용도로 쓰인다. 사진=김성호 교수

 

겨울날의 세 가지 벗이라는 뜻으로 세한삼우(歲寒三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매섭게 추운 겨울날을 고고하고 늠름한 자태로 버텨내는 세 가지 벗은 송죽매(松竹梅)로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매화나무입니다. 명나라 때 진계유(陳繼儒)는 세한삼우 중 매화와 대나무를 취하고 그에 국화와 난초를 더한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四君子)라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동양화의 변함없는 화제(畵題)로 사랑받는 사군자의 유래입니다.

 

사군자 중에서도 만물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꽃을 피워 가장 먼저 봄을 알림으로써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삼았던 매(梅)는 꽃을 매화라 부르니 꽃이 달려 있을 때는 매화 또는 매화나무라 부르고, 열매는 매실이라 하니 열매가 맺혀 있을 때는 매실 또는 매실나무라 부릅니다. 꽃도 열매도 없을 때는 각자 인연의 깊이에 따라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저렇게 부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고운 빛깔에 그윽한 맛과 향기를 가진 매실주로 인해 매실에 더 인연이 깊어 매실나무라고 부를 때가 많습니다.

 

매화가 난초,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에 들어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서운 추위를 뚫고 꽃을 피워내는 곧은 기상, 욕심을 내어 번질번질 살찌우지 않고 오히려 가난해 보이는 가지의 모습, 잔설도 헤치고 은은하게 퍼지는 그 향기, 활짝 펼쳐지지 않고 선비가 가지런히 옷깃을 여미듯 오므라져 있는 꽃봉오리의 단아한 자태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매화나무의 모습을 닮고자 선비들이 학문에 정진하던 서원이나 세상의 욕심과 등을 지고 본인의 수학은 물론 제자의 양성에 힘을 쏟았던 정원이나 정자 곁에는 어느 곳이나 매화나무 한 두 그루가 심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00094043_P_0.jpg » 추위를 뚫고 이른 봄 가장 일찍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 사진=한겨레 사진 디비

 

매화는 꽃의 색에 따라 흰 매화(白梅)와 붉은 매화(紅梅)로 나누며, 매실은 아직 덜 여문 푸른 매실을 청매(靑梅)라 부르고 누렇게 다 익은 것은 황매(黃梅)라고 합니다. 매실은 또한 보관을 위한 처리 방법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부르는데 매실을 짚불 연기에 검게 그을려서 말린 것은 오매(烏梅)라 하고, 소금에 절여 말린 것은 염매(鹽梅)라고 합니다. 염매는 소금에 절인 다음 말린 것이라 겉에 소금기가 남아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매(白梅)라고도 합니다. 한방에서 오매는 갈증을 덜어주고 설사를 멎게 하며 기침을 가라앉히는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구충제로도 사용하며, 염매는 설사, 중풍, 유종(乳腫)을 다스리는 약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매실은 무엇보다 속에 탈이 난 것을 달래주는 효능이 탁월합니다. 매화나무를 정성스럽게 가꿔 매실이 많이 달리는 마을에 가면 집집마다 ‘매실고’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실고는 청매를 따다 깨끗이 닦아 씨는 빼내고 과육만 은근한 불에 꾸득꾸득해질 때까지 달인 것인데 소화가 잘 되지 않을 때나 이도 넘어서 배가 아프고 토하며 설사가 날 때 요긴하게 쓰는 가정 상비약인 셈입니다.

 

섬진강이 남해와의 만남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역은 강의 가장 깊은 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인 동쪽은 경상남도 하동 땅이 되고, 왼쪽인 서쪽은 전라남도 광양 땅이 됩니다. 매실나무는 무엇보다 추위를 잘 견디고 건조에도 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어디에서라도 자리를 잘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겨울이 끝난 것 같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직 봄이라 말하기도 어설픈 시기에 이르면 이 두 지역은 온통 매화로 뒤덮이게 됩니다.

 

00197603_P_0.jpg » 전남 광양 청매실농원에서 항아리에 매실을 숙성시키고 있는 모습. 사진=한겨레 사진 디비

 

몇 해 전, 생각을 함께 하는 20여명이 모여 이박삼일의 일정으로 지리산 주위의 유적지를 따라 문화답사를 할 때였습니다. 하루의 귀한 일정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위해 매실이 많이 열리는 하동의 한 마을을 찾아 들었고, 식사 장소는 손맛과 더불어 욕맛으로도 무척 유명한 어떤 할머니의 한식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넉넉한 밥상을 앞에 둔 아들 녀석의 표정이 영 시원찮아 보였습니다. 점심을 먹는 것도 평소와 달라 배도 고팠을 텐데 말입니다. 다섯 살 이후로 십년 동안 어디가 아프다 하는 말을 하지 않은 너무도 고마운 녀석이어서 많이 놀라 물어보니 점심이 체한 듯했습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는 옆방에 편하게 눕히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잠시 뒤, 식사하는 사람들을 두루두루 챙기시며 한바탕 신나게 밥맛에 욕맛까지 더해 주신 할머니의 눈길은 저녁도 먹지 못하고 옆방에 누워 있는 아들에게 닿았습니다. 그 순간 이후로 욕쟁이 할머니는 더 이상 욕쟁이 할머니도, 남의 할머니도 아니었습니다. “아가야, 아가야.” “어쩌나, 어쩌나.” 하시면서 할머니께서 가져오신 것은 실과 바늘 그리고 매실고였습니다. 어깨에서 손까지 몇 번을 쓸어내리시다 손가락을 실로 꽁꽁 묶고 바늘로 손톱 바로 위를 살짝 따내니 검은 피가 방울로 맺혔고, 당신 손으로 만드셨다는 매실고 탄 물을 작은 잔으로 두 잔을 마신 아들은 잠시 후 거짓말을 하듯 이제 살 것 같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한 아들은 할머니께서 손수 따로 끓여주신 죽도 한 그릇 다 비우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매실이 잘 익는 마을은 인심도 그렇게 잘 익어 있었습니다.

 

김성호/ 한겨레 물바람숲 필진, 서남해 생명과학과 교수